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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갑옷 고증자료 연구

http://enjoyjap.egloos.com/1632147

Ancient Korea Armour collection



한일 역사판에서 쓰이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삼국시대 갑옷 갑주 투구 헬멧 사진 전부 다 모아놨습니다.
역사판에서 쓰이는 토론용 떡밥들은 거짐 모아놨으니 곁가지만 붙여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1500년전 삼국시대 갑옷들은 특히 무기류 부장풍습이 있던 가야고분에서 많이 발굴되는데 두종류가 대표적입니다.
가야는 상무정신이 국책이던 나라였던 반증이기도 한데 화려한 사치품을 고분에 넣어두던 백제나 신라와는 대조적입니다.
개다가 짱개들은 듣도보도 못한 형식의 판갑옷들은 한국 고대문화의 독자성과 기술력을 잘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삼한에서는 3세기부터 동양에선 유일하게 판갑들이 출현했는데, 뼈갑 목갑등이 철기기술을 만나 변한것입니다.  
로마 당시 철광산이 있고 철광석을 제련해 수출하던 나라는 가야뿐으로 갑옷또한 쇠로 만들줄 알았던 것입니다.
부여나 고구려에선 기마민족이 쓰던 찰갑이 유행합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 가야 왜를 정벌하러 내려왔을때
보병전 위주던 삼한소국들을 중장기병으로 크게 이기자,  삼한에서도 기병용 찰갑이 대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개마무사 :  덮을 개(蓋), 말 마(馬).. 말까지 갑옷으로 덮은 중장기병이란 뜻입니다

고대에 고구려 개마무사가 왜 무적이었냐면
이렇게 중장기병을 일렬로 세운뒤 전속력으로 다 뚫어버리고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고구려 명물인 각궁 파르티안 샷까지 추가하면 근거리 원거리 캐사기 캐릭입니다.
북한 약수리 고구려 고분벽화
.

개마무사가 흰소가 끄는 수레에 탄 왕족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태권브이 머리통 모델이 되었던 뿔 투구가 이 벽화에서 따온것으로 유명합니다.


고대의 삼국시대 장군들의 쇠투구는 마치 소머리 같은데 우두머리라는 단어가 그래서 생겼습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신라나 가야 장군들을 토끼나 소머리 등의 별명을 붙여놓은 것을 볼수 있는데 이게 다 투구때문.

2010년 신제품 완전고증된 고구려장군 피규어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js1979&logNo=50097456447
원형 제작자분 블로그 가면 사진 많습니다.



고구려어로 쇠를  쇠(釗), 사유(斯由)라고 부릅니다. 斯는 삼국시대 한자발음이 '시'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에선 지금과 똑같이 시유(쇠)..라고 불렀다고 볼수있습니다.

한자로 부를때는 철을 毛(털)자로 자주쓰는데 텰(털의 옛말)과 철(鐵)의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철원의 고구려때 지명이 모을동비인데.. 읽을때는 '텰다미'가 되는것이죠.


왜국 유물은 100년 단위로 한반도보다 약간늦게 출현하는 정도이며 가야나 백제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광개토대왕때 남하정책으로 전쟁을 피한 수십만명의 백제귀족이나 삼한 난민들이 일본열도로 피난갔고,
이때를 열도에서는 역사기록이 없는 수수께끼의 4세기라 합니다 (실제로는 국가 형성시기)
  100년 이후 안정된 뒤 5세기부터는 왜국에도 이주민덕에 판갑이나 찰갑등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도에서는 아직 철광석 산지를 발견 못해서 대부분 가야에서 구입해 사용했습니다.
오사카나 큐수 전방후원분에 부장된 가야판갑들이 대부분 그런것들입니다.
몇몇 원숭이들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며 고고학을 부정하며 가야는 일본의 속국이다 주장중이지요 (웃음)

백제의 금칠된 소찰주

 이제서야 사극에서도 소찰주가 최초로 활용됨.. 감격이군요
왕이 착용하는 것은 금색이면 더 좋습니다. 


고구려군의 영향으로 가야나 신라 백제는 당시 최신식 전투기어였던 고구려 개마무사를 흉내내게 됩니다.

개마무사의 트레이드 마크  목보호개 (금관가야)

 있고없고에 따라서.. 삼국시대 느낌이 나냐 안나냐 비주얼에서 엄청나게 차이나지요.

가야에서 발견된 목가리개 (고구려 백제 신라 공통)

현재까진 신라에서 동양에서 최고로 오래된 판갑(종장판갑)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3세기 말)
아마도 가야의 철로 만든 제품일것인데.. 가야지역에서 더 오래된 것이 발굴되길 기대합니다.
가야인들은 부여의 피난세력이기 때문에 중간 루트인 강원도나 함경도 지역에서 더 오래된 형태가 나오지 않을까요.

연관이 높은 기원전 스키타이 장군의 갑옷입니다.
신라에서 나온 최초의 종장판갑 형상을 보면 구조가 거의 비슷하지 않나요??
신라의 지배자들이 가야의 철기 제작자들에 의뢰해 만든것이 판갑의 탄생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울산 중산리 종장 판갑입니다.
위의 구정리 판갑 계열의 극초기 3~4세기 종장판갑으로 끈으로 연결한 구멍이 잘 보입니다.
왜구들이 판갑 기원은 일본 데스! 날조할때 살포시 보여주면 버로우하는 아이템입니다


판갑들은 후대로 갈수록 둥글둥글해지고 여러가지 장식도 붙고 목부분의 방어형식이 바뀝니다.
철판을 이어붙이는 방법은 고대로 갈수록 가죽끈이고 후대로 가면 리벳식입니다.
철판이 세로로 붙으면 대부분 4세기대의 초기판갑이고 가로로 붙인 판갑은 대부분 5세기 이후의 후대판갑.
삼각판갑옷은 남은 철조각을 재활용한 갑옷으로 주로 낙동강 유역 고분이나 왜국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금관가야의 갑옷중에는 회오리 장식이 붙는 화려한 판갑들이 출토되는데 김해 인근에서만 출토됩니다.
잘보면 초기 종장판갑의 결정판으로 전세계에서 한국에서만 출토되는 오리지날 한국 갑주입니다.
한일 갑주의 기원이 되는 형태로 앞 열림의 경첩구조, 유선형곡선, 철판의 결합법등 초기판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회오리(고사리 장식)은 고대 유라시아 청동기등에서 유행한 태양을 상징하던 문양인만큼 고풍이 느껴집니다.




현미경 조사결과 깃털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합니다.

금관가야의 종장판갑인데 장군 갑옷을 일개 병사처럼 복원했습니다.
어깨나 허리등은 목재나 가죽방어구를 착용했을테고 갑옷안에 가죽옷을 입지 않으면..
화살맞으면 판갑은 방어력이 약해 뚫려 죽을 확률이 높죠. 

금관가야 대성동 고분군 종장판갑 셋트
대성동 고분군은 삼국에서 보수성이 제일 강해서 고대의 종장판갑이 상당히 후기까지 사용됩니다.

금관가야 판갑
디아블로2에서 한국셋템이라 나왔던 그 갑옷.
유럽에 내놔도 안꿀릴 가장 오래되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아이템.



대가야 횡장판갑 (고령 지산동 고분군)
판갑의 소멸기에 출현한 갑주로 판갑의 완성형이자 왜국에서는 이것이 최초 판갑 형식입니다.
한국에선 분류상 횡장판갑이라 부르는데 판갑의 마지막 형태로 리벳결합과 가로로 붙인 철판이 특징입니다.
또한 고구려식 깔대기형 목보호대가 소멸되고 어깨끈을 철판형태로 만들어 요즘의 방탄복 비스므리 합니다.
저런 형식의 투구를 일본 사학계 용어분류로 첨각부주(세모꼴 투구)라고 합니다. 경남 고령 지역과 열도에서 출토됩니다.
대가야가 망해가는 바람에 기술유출도 심하고 왜국에 수출되던 양산형 제품이라 일본 고분시대 중기 유적에 자주 등장합니다.


가야에서 판갑을 사다쓴 왜국 하니와(토용)
일본서기를 보면 판갑을 '가와라'라고 부릅니다. 기왓장이라는 뜻입니다.
열도에서는 철기공방이 6세기 쯤에 시작되는데 그이전까지는 대부분 가야나 백제에서 완제품이나 철정으로 사왔습니다.
물론 현지에 파견된 담로왕들에게 갑옷 제작 기술자는 딸려서 보냈겠지만.. 철광산의 발견이 상당히 늦었습니다.

요즘 왜놈 작것들은 동양에서 최고로 완성된 판갑 문화를 전수해준 가야에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지 못할망정
개호로세끼처럼 부모국의 은혜를 몰라보고 열화 카피 복제품인 사무라이 목제 요로이나 자랑질에 여넘이 없으니 안습입니다.

일본에서 복원한 대가야의 횡장판갑 복원. 왜국 장군의 5~6세기 모습이기도 입니다.
근데 4세기 황남대총 팔뚝보호대를 정강이에 붙여놓고 야요이 시대 방패에 5-6세기 대가야 판갑과 투구 
게다가 열도의 큐슈와 김해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4태극 파형동기가 박혀 있는 금관가야 유물까지 짬뽕.
ㅡㅡ;
정말 시대를 뒤섞어 만든 무개념 레플리카 복원품이지만 상당한 퀄러티로 재현한 것은 봐줄만 하네요.

타레무늬는 방패에 붙이는 징으로 본래 삼한에서 쓰던 주술적 도형입니다.
역사스페셜에서 파형동기 기원을 듣도보도 못한 오키나와 조개 껍데기로 잡고 있던데 그럼 이건 뭥미요?
기원전 1세기의 전남 신창동 유적의 마한 방패는 한국 고고학의 좁은 시야를 살벌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당시 동북아 기마민족들간에 유행하던 찰갑 형식(티벳제품)
 
고구려 벽화에서 어깨부분 찰갑은 붉은색으로 멋을 낸다. 왼쪽은 고구려 찰갑의 발굴모습

최근 신라고분에서 마갑부터 찰갑까지 한번에 원형으로 출토되었다.
마갑은 중국에서도 선비족 마갑 1개 정도 발견되는 수준의 희귀한 유물이며 한국에서 자주 발굴되고 있다.

신라군 기마무사 중장갑옷 풀세트는 고구려벽화와 100% 씽크로되어 갑 옷메니아들로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킴
개마무사의 모든것이 다 출토됨 (2009년 발굴모습)


고구려식 기마용 찰갑옷

평양지역의 고구려 개마군 벽화는 후기벽화답게 가장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벽화에 무덤주인이 가지고 있던 '개마(蓋馬)의(之) 모습(像)'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북한에서 복원한 개마무사 모습


마갑에 부착시켜 알록달록한 여러 깃발을 달아놓던 도구와 등자
백제유물은 찰갑 유물이 드물지만 정읍에서 발견된 백제 기와에 찰갑의 기마병이 묘사되어 있다.

new! 백제 검은 옷칠 찰갑 실물 (2011년 공산성 발굴품)
 이 찰갑은 왜국 하니와(토용)에나 표현되던 백제 고위급 찰갑옷의 실물이라 생각됩니다.

하니와를 토대로 복원한 왜국 고분시대 왜왕의 찰갑 복원.

창달리고 술잔 달린 투구는 백제 담로왕(왜왕)들이 쓰던 투구입니다.
술잔 관모는 백제에서만 쓰이던 유물인데 이걸 일본에서도 나온다고 일본유물로 보는 바보들도 있더군요.
박물관에 가서 동북아에서 술잔 같은 장식을 신하들이 머리에 붙이고 다니던 국가를 찾아보세요
백제 뿐입니다.

일본서기에서 천황과 셋트로 나오는 백제인들은 대부분 동일 인물입니다.  
일본서기가 타국의 왕이던 백제왕들의 사망시기를 꼼꼼히 기록해 기년을 맞춰 놓은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도로 떠났다한들 조상들 제사 날자는 알아야 하기 때문


북한의 덕흥리 고분의 고구려 개마군
찰갑에 붉은칠을 한 갑주와 거대한 투구 깃이 인상적
덕흥리 고분의 고구려 벽화도는 그나마 4세기(1700년전) 초기 고구려군의 위용을 알수 있는 아주 이른시기 자료입니다.




가야의 개마무사 토기

가야 말투구

일반 병사들의 병장기 패용형태 (북한 안악고분)

고증을 하려면 카이젤 수염부터!

 벽화를 보면 고구려 남자는 왕부터 병사들까지 대부분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안악3호분의 고구려군단 행차 모습


북한 안악고분의 고구려 개마무사 확대

고구려군 장군이 말에서 내려 적장의 머리를 한손으로 잡고 참수하는 장면

집안 퉁구12호분 고구려군 전투모습.
적장을 참수하는 장면

확대 모습

옥전 고분의 갑옷을 토대로 복원한 가야의 장군


복천동 고분 출토 찰갑의 가야 개마무사 복원
상당히 공들인 개념복원 작품입니다.

가야기병 복원품

상당히 멋을 낸 고구려군 찰갑 복원.
약간 억지스러움.

카이젤 수염의 당당한 고구려 수문장.
이것이 진짜배기

전투용 스파이크 군화에 주목

북한의 마선구1호 고구려고분 기마병 모사도

웃퉁을 벗고 전진하는 고구려의 장사

조의선인/早衣仙人 (검은 옷을 입은 선인) - 길림성 무용총 벽화
고구려의 모든 대가(大家)들은 조의(早衣)·사자(使者)·선인(先人)을 두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것처럼 일종의 사병집단입니다.
조의 선인은 당태종을 상대로 안시성 전투에서 대활약했기 때문에 고구려군을 고증할때 빼놓을 수 없는 전투집단으로.
 사극보면 머리 빡빡 깍고 검은옷입고 나오시는 그분들입니다.
벽화를 봐도 약간 큰 두루마기에 주름치마까지 입으니 어딘가 수도승 분위기가 납니다.
고구려의 천신들이 입던 옷을 보면 좀더 고풍의 검은 옷들도 보입니다.
 삼족오를 들고 다니는 고구려의 태양신 벽화

고구려군 목투구를 갖춘 형식의 법신 (북한 문화재)


김유신 묘지석의 신라 명광개
당나라의 쫄다구 앞잡이로.. 고유의 갑옷을 내버리고 중화를 따르는 후기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볼수있습니다..


참고로 중국 갑옷의 발전사
진나라때는 말린 돼지가죽을 이용하다가 역시 가죽인 명광개로 발전합니다.
무협영화용 갑옷들로 한국 사극에 이런거 입히는 정신나간 사극 제작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더이상 고구려 백제 신라 장군들을 당나라군으로 만들지 맙시다.
명광개 입힌 한류 사극들 짱개들 반응 보면 당나라군 옷을 입었다고 한국을 비웃는 놈들이 많습니다.

당삼채던가? 당나라 도자기에 나타난 명광개.
한반도의 절간 사천왕들도 대부분 이 갑주를 걸치고 있습니다.

 당나라군과 싸우는 고구려의 철갑 개마무사 - 해외의 갑옷일러스트


가야국 소찰주


환두대도 차는법 (고구려 사신단 - 사마르칸트 벽화)
 

사극에 자주 나오는 가야국 보검

무령왕릉 보검 디테일
백제검의 특징은 고리(環/환)부분은 착탈식이 가능한 형태라 여러가지 코스튬이 가능합니다.
백제 유물에 자주 나타나는 육각형의 귀갑문부터 서역의 당초문 용을 잡아먹고 사는 봉황문까지
백제왕의 권세를 잘 알수있는 유물입니다.
무령왕릉 백제왕 보검의 손잡이 디테일.
당시 로마에서나 쓰이던 누금기법이 칼 손잡이에 적용되어 있습니다.
백제 도검들은 접철의 단조식으로 제작되는데 백련철 어쩌고 하는 칠지도를 봐도 그런 문구가 있습니다.무령왕릉 백제왕 보검 복원품


신라왕의 쌍검
6개의 검을 가지는 기묘한 형태


가야연맹이던 다라국 옥전고분의 횡장판갑 셋트 (신라~가야 공통의 형식)


 음성군 망이산성 출토 백제 횡장판갑
전남 고흥의 백제고분에서 갑옷 투구 및 관직 세트가 한꺼번에 출토되었습니다.
어깨부위 보호대도 출토되었지만 가야와 거의 같습니다. 
매우 후방지역이라 백제의 담로왕들의 복식을 연구할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보존처리된 백제 투구 확대 사진

큐슈의 백제 담로국들에도 백제관모와 함께 챙달린 백제투구가 몇몇 출토되고 있습니다.
기존 신라나 가야 투구보다 복발이 좀 낮아지고 챙이 달리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에타후나야마 고분 출토품을 보면 백제 담로왕들에게 하사하던 위세품들은 거의 동일합니다
누군가 공주 수촌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관을 건담머리처럼 쫙쫙 핀 복원.(역겔)

山자 형상의 장식은 신라에 많지만 원래 압록강인근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는 금동관에 그 원류가 있습니다.

초기 형태를 보면 전부 깃털형상으로 조우관을 그대로 금동관으로 모방해 제작된 것들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생긴것임.(공주 수촌리 백제 금동관)
고구려 벽화를 보면 어떻게 쓰는지 잘 나옵니다.

고구려  관모 머리 장식 : 북한 문화재,

고구려 관모 장식

고구려군만 사용했던 스파이크 전투화


신분에 따라 각양각색인 안장장식

황남대충 비단벌래 마구 (4~5세기 신라왕이 쓰던 말안장 복원)

황남대총 비단벌레장식 마구 디지털 복원



일본에서는 발견된 야요이시대의 가야의 목제방패(파형동기가 붙어있다)

동시대 로마군과 고구려 기병의 비교
 중장기병 만큼은 고구려가 당대 최강


삼국시대 화살통


찰갑 복원도 (유목민족)

부여갑옷의 찰갑 역는법 (길림성 노하심 유적)

집안 광개토대왕릉 출토 고구려 금동 찰갑
찰갑은 소외 비늘갑옷으로 일정한 크기의 소찰을 횡으로 연결한 다음 다시 종으로 수결하여 상하 유동성을 가지도록한 갑옷이다. 소찰을 좌우로 연결하여 전동의 중앙에서 여미는 것을 동환식, 전동과 후동의 좌우 옆구리에서 여미는 것을 양당식이라 한다. 이러한 찰갑은 몸통부분외에도 여러 가지 갑 부속구를 구비하는데, 찰갑과 세트를 이루는 것은 목가리개, 팔가리개, 팔뚝가리개, 상갑, 대퇴갑 등이 있다. 찰갑은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먼저 시작되어 신라와 백제로 퍼져나갔는데, 고구려는 4세기 전반 산성하151호분, 만보정241-1호에서, 5세기초 우산하 31호분에 실물자료인 소찰편이 출토하였고, 3세기 후반 요동반도에 위치한 요양의 삼도호서진묘 석실벽면에 장도를 차고 종장판투구를 쓰고 찰갑을 입은 전사모습과 4세기 안악 3호분의 행렬도로 보아 이미 기마전술과 함께 기마용무구인 찰갑이 고도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가야 및 백제지역에서도 양호한 4세기대 찰갑자료가 출토하여 이 지역 찰갑의 발전과정을 알 수 있다. 백제지역에서는 서울 몽촌토성의 저장혈에서 뼈로 만든 찰갑이 있는데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철이 아닌 유기질로 만든 갑옷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에 비하면 신라`가야지역의 4세기대 찰갑의 형태는 곡률이 있는 방형의 허리부분 소찰을 중심으로 상하 3단씩 전체 7단으로 구성되며, 소찰의 하나의 크기도 약 4cm×8cm 정도로 크다. 이것은 이후에 나타나는 5세기대 찰갑과 달리 상하 유동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설계되었으며 또한 같은 시기 고구려에서는 상하유동성과 기동성이 고려된 중장기병용의 찰갑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계보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4세기대 철제 소찰갑은 동래 복천동 38호, 동래 복천동 64호, 경산임당 1A-60호가 있으나 복원이 힘들어 구체적인 형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다. 5세기대 찰갑 역시 구체적인 복원은 어려우나 4세기대 소찰갑과는 전혀 다르게 설계된 찰갑으로 소찰의 크기는 대체로 2. 5cm×5∼9cm 정도로 작아 소찰수가 훨씬 많아졌다. 또한 상하 유동성이 확보되어 보관할 때는 아랫단이 윗단 밖으로 차곡차곡 접어져 일본에서는 괘갑이라고 부른다.
복천동 11호분 출토찰갑을 근거로 그 구조를 간단히 살펴본다면 허리를 중심으로 위에 해당하는 동갑찰이 6단, 허리부분인 요갑찰이 1단, 그 아래 상갑찰이 4단이 확인되며 그 외에도 팔뚝에 해당하는 상박갑, 대퇴갑 등이 있어 부위에 따라 다른 형태의 소찰을 사용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찰갑과 중국의 찰갑과 가장 큰 차이는 허리부분에 만곡한 요찰의 사용과 상하단 연결에서 아랫단을 밖으로 덧대는 것이며 이러한 형태의 찰갑은 5세기 전반대에 해당하는 김해 대성동 3호분을 시작으로 신라, 가야지역에 집중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찰갑 파편 - 영종도 출토 (기원전1세기 부근)

찰갑 복원품 (상의)

북한 낙랑구역 정백동 1호 묘에서 나온 찰갑편(한국고대복식)

발해 갑옷의 찰갑편 및 부속구 (러시아 연해주 발굴)

3세기 신라투구
3세기 신라투구(복원품)

고구려 귀족이 집에서 각궁 보관하는 법


금관가야국 월도 및 장창류
대성동 고분군 출토



대성동 박물관의 가야 개무무사 복원상

발해투구

낙랑 말투구(가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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