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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권사(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남서울은혜교회)

http://fgnews.egloos.com/232334

“디지로그 감각 인재 키우겠습니다”

간호사 가정사역자 교수 호스피스로 섬김 앞장
신앙인으로서의 ‘첫 마음’ 지켜 후진 양성 최선

온라인대학의 역사를 선도하고 있는 서울사이버대학교 김수지 총장을 만났다. 서울사이버대학교는 최첨단 대학캠퍼스를 갖추고 있으며 7,000여 명의 재학생들이 온·오프라인 환경에서 실습·세미나·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학교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이버대학의 리더다.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대학은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을 건학이념으로 설립됐다.

우리나라 간호학 박사 1호인 김수지 권사는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2004년 서울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해 2006년 초 졸업한 이 대학 동문 총장이다. ‘첨단정보화 글로벌시대에 걸맞게 활발한 국제적 교류를 통해 사람을 섬기며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아우러지는 디지로그의 균형감각을 소유한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김 권사는 “서울사이버대학교는 사이버대학의 특성에 맞게 현장에서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14개학과가 운영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실기와 이론이 조화된 이 대학의 교육 성과물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발자취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국내의 여러 사이버대학교 중 최다 대학원 진학률을 기록하고 있고, 인지도?차별성?선호도?성장성 등에서 다른 대학들을 제치고 있다. 김 권사는 “우리대학의 강점은 정직함”이라며 “다른 대학들에 비해 조금 앞선 것에 자만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교육가로서의 첫 마음을 지켜 학생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그의 삶의 신조를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신앙이 성장하며 이 신조는 표현을 약간 수정했다. 지금은 “매사를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껏 간호사로, 가정사역자로, 호스피스로 살아온 삶이 주님께서 이끄셨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그의 이런 고백은 김 권사의 지나온 발자취가 확인해줬다. 김 권사는 성경적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 권사와 두 살 아래 여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을 나갔다. 김 권사의 어머니는 그 때부터 집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길러 팔며 김 권사와 동생을 어렵게 키웠다.

김 권사가 다섯 살 되던 해에 교회에 첫 걸음을 디뎠다. 동생의 손을 잡고 시장으로 어머니를 찾아 나섰는데 지나가는 트럭으로 인해 동생과 그는 신작로의 먼지를 온통 뒤집어썼다. 동생은 눈물 콧물까지 범벅이 돼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아이들의 찬양소리가 들렸다. 교회였다. 한 여선생이 교회 앞에 쪼그리고 선 김 권사와 동생을 보더니 뛰어나왔고 물을 떠다 동생의 얼굴을 씻기고 과자와 음료를 건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구원프로그램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 프로그램에 삶이 맞춰졌다.

여수서초등학교 1학년 때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부상당한 한 남자를 극진히 보살펴주는 간호사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 모습이 가슴깊이 남았다. 간호사의 꿈이 심겨지는 순간이었다. 꿈은 그를 이끌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가을운동회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학교에서는 가장행렬을 준비했다. 선생님께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간호사로 분장해 볼 것’을 권했다. 간호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집 근처 의원에서 간호사 캡을 빌렸지만, 유니폼이 문제였다. 어린아이의 몸에 맞는 간호사 유니폼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새벽예배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뜻밖의 제안에 걸맞게 응답 또한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왔다. 2년 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했던 외삼촌이 소포를 보냈다. 운동회 전날 도착한 큰 상자 안에는 하나님께 애태우며 기도했던 하얀색 원피스와 스타킹이 들어있었다. 물자가 귀한 시절이었기에 가장행렬에서 그는 단연 돋보였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이 경험은 간호사를 천직으로 알게 한 일이 되었다.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숙명여고 2학년 때였다. 무더운 8월 첫 주일예배 때 호주 선교사의 설교를 들으면서다. 선교사는 요한복음 3장 3절 말씀을 인용, 거듭남에 대해 전했다. 그때 우리 성경에는 거듭남이 ‘중생(重生)’으로 표현돼 있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김 권사는 선교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며 ‘본 어게인(born again)’을 강조했을 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교회에 다니고 착한 일을 하며 성경대로만 살면 모두 천국에 가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후 헬렌 캡이라는 선교사를 만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방법을 배웠다. 그 방법은 ‘4F’로 요약된다. 하루의 삶에서 최우선적으로(First priority),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Faith in God’s word), 그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고(Follow the word), 열매 맺는 삶(Fruitful life)을 산다는 것으로 ‘주의 말씀을 최우선적으로 행하고 따를 때 비로소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이화여대 간호학과에 진학한 뒤 그는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병든 자들을 살펴주신 것처럼 그 역시 그러한 이들을 섬기겠다’고 결심했다.

1966년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결혼 후 2년 동안 김 권사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치밀하고 완벽했던 그의 남편은 흐트러진 물건이며 먼지를 참지 못했다. 그때마다 야단치듯 김 권사를 몰아붙였고 그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결국 이혼이야기가 나왔다. 그의 남편은 6개월의 기회를 달라고 했고 “성경에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들어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그대로 함께 노력해보자”고 했다. 그날부터 그들 부부는 잠자리에 들기 전 함께 부부생활에 대한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하며 그대로 적용하려고 애썼다. 두 달이 지나자 남편은 물론이고 그 역시 달라졌다. 이 훈련이 가정사역자로 나서는 데 기초가 되었다. 전화위복이었다. 미국으로 유학갔던 1972년부터 김 권사 부부는 유학생 부부의 상담자로 나섰다. 부부싸움으로 고민하던 유학생 부부에게 신혼 초 김 권사 부부가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성경적인 견해를 들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유학생 부부를 대상으로 부부 워크숍, 세미나 등을 인도했고 1978년 한국에 들어온 뒤 본격적으로 이 사역을 펼치며 가정사역자로 활동했다. 그의 남편은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도 적극 지원해주었다. 특히 정신질환자 재활센터나 호스피스 시설 지원에 힘을 보태 줬다.

그렇게 간호사로, 교수로, 호스피스로 쉼 없이 달려왔다. 64세까지 열심히 일을 했으니 이제 허리를 펴고 쉴 만도 하겠지만, 하나님은 아직 쉴 때가 아니라고 하셨다. 지난해  김 권사는 정년을 1년 앞두고 ‘서울사이버대학교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김 권사는 “지금 이 자리가 선교와 연결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 어디로든 자유롭게 소통하고, 이 소통 창구를 통해 복음의 메신저들이 지구촌 구석구석에 진출하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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