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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25)-부산왜영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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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유경과 고니시 사이에 진향되던 강화교섭은 양측이 모시는 각 국가 수뇌들의 요구를 도저히 절충시킬 수 없었고, 한 때 강화사기극까지 도모하지만 이것도 들통나면서 강화협상은 끝장난다.

 그리하여 일본의 재침공이 가시화 되던 시기, 조정에는 삼도통제사 이순신이 올린 한 통의 장계가 도착한다. 그것인 이순신의 부하인 안위 등이 적 점령지인 부산에서 적군 진영을 방화한 일에 대한 보고였다.

 12월 27일에 성첩(成貼)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신의 장수 가운데 계려(計慮)가 있고 담력과 용기가 있는 사람 및 군관(軍官)·아병(牙兵)으로 활을 잘 쏘고 용력(勇力)이 있는 자들이 있는데, 항상 진영에 머물면서 함께 조석으로 계책을 의논하기도 하고 그들의 성심(誠心)을 시험하기도 하고 함께 밀약(密約)하기도 하였으며 또 그들을 시켜 적의 정세를 정탐(偵探)하게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터에 거제 현령(巨濟懸令) 안위(安衛) 및 군관 급제(及第) 김난서(金蘭瑞), 군관 신명학(辛鳴鶴)이 여러 차례 밀모(密謀)하여 은밀히 박의검(朴義儉)을 불러 함께 모의했습니다. 그랬더니 박의검은 아주 기꺼워하여 다시 김난서 등과 함께 간절하게 지휘(指揮)하면서 죽음으로 맹세하고 약속하였습니다. 같은 달 12일, 김난서 등은 야간에 약속대로 시간 되기를 기다리는데 마침 서북풍이 크게 불어왔습니다. 바람결에다 불을 놓으니, 불길이 세차게 번져서 적의 가옥 1천여 호와 화약이 쌓인 창고 2개, 군기(軍器)와 잡물 및 군량 2만 6천여 섬이 든 곳집이 한꺼번에 다 타고 왜선(倭船) 20여 척 역시 잇따라 탔으며, 왜인 24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지만, 대개 김난서가 통신사(通信使)의 군관(軍官)에 스스로 응모하여 일본을 왕래하면서 생사를 돌보지 않았기에 마침내 이번 일을 성공한 것입니다.
  안위(安衛)는 평소 계책을 의논하다가 적에 대해 언급할 경우 의분에 분개하여 자신이 살 계책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의 군관 김난서와 신명학 등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들어가 갖가지로 모의하여 흉적의 소굴을 일거에 불태워 군량·군기·화포 등 제구(諸具)와 선박 및 왜적 34명을 불태워 죽게 하였습니다. 부산(釜山)의 대적을 비록 모조리 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적의 사기를 꺾었으니 이 역시 한가지 계책이었습니다.
  일본을 왕래하는 경상 수영(慶尙水營) 도훈도(都訓導) 김득(金得)이 부산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날밤 불타는 모습을 보고는 이달 12일 2경(更)에 부산의 왜적 진영 서북쪽 가에다 불을 놓아 적의 가옥 1천여 호 및 군기(軍器)와 잡물·화포(火砲)·기구(器具)·군량 곳집을 빠짐없이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서로 모여 울부짖기를 ‘우리 본국(本國)의 지진(地震) 때에도 집이 무너져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이번에 이곳에서 또 화환(火患)을 만나 이 지경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럴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안위·김난서·신명학 등이 성심으로 힘을 다하여 일을 성공시켰으니 매우 가상하며, 앞으로 대처할 기밀(機密)의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니 각별히 논상(論賞)하여 장래를 격려하소서.”

이 장계대로라면 대규모 확전을 앞두고 안위와 김난서, 신명학은 적진에 큰 타격을 주는 공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바로 또 다른 장계가 올라오면서 상황은 꼬여 간다. 그 장계를 올린 사람은 선전관으로 경상도에 파견된 이조좌랑 김신국이었다.

이조 좌랑(吏曹佐郞) 김신국(金藎國)이 서계(書啓)하였다.
  “지난날 부산의 적 소굴을 불태운 사유를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장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거느린 군관 정희현(鄭希玄)은 일찍이 조방장(助防將)으로 오랫동안 밀양(密陽) 등지에 있었으므로 적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정희현의 심복이 된 자가 많습니다. 적의 진영을 몰래 불태운 일은 이원익이 전적으로 정희현에게 명하여 도모한 것입니다. 정희현의 심복인 부산 수군(水軍) 허수석(許守石)은 적진을 마음대로 출입하는 자로 그의 동생이 지금 부산영 성 밑에 살고 있는데 그가 주선하여 성사시킬 수 있었으므로 정희현이 밀양으로 가서 허수석과 몰래 모의하여 기일을 약속해 보내고 돌아와 이원익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날짜를 기다리는 즈음에 허수석이 급히 부산영에서 와 불태운 곡절을 고했는데 당보(쩦報)도 잇따라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원익은 허수석이 한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순신의 군관이 부사(副使)의 복물선(卜物船)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도착했었는데 마침 적의 영이 불타는 날이었습니다. 그가 돌아가 이순신에게 보고하여 자기의 공으로 삼은 것일 뿐 이순신은 당초 이번 일의 사정을 모르고서 치계(馳啓)한 것입니다. 허수석이 작상(爵賞)을 바라고 있고 이원익도 또 허수석을 의지해 다시 일을 도모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갑자기 작상을 내리면 누설될 염려가 있으니 이런 뜻으로 유시(諭示)하고 은냥(銀兩)을 후히 주어 보내소서. 조정에서 만일 그런 곡절을 모르고 먼저 이순신이 장계한 사람에게 작상을 베풀면 반드시 허수석의 시기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적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방비를 더욱 엄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모한 일을 시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원익이 신에게 계달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 이번 비밀리에 의논한 일은 이미 이원익의 장계에 있기 때문에 서계하지 않습니다.

 김신국의 장계대로라면 이순신은 명백한 허위 보고를 하였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이는 사실로 받아들여져 이순신의 장계가 임금을 속인 ‘기망장계’이며 이것이 이순신이 지은 죄 중 하나라는 논리가 이어져 왔다. 특히 이순신을 폄하하던 원균 옹호론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소재였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내보겠다. 이순신과 김신국의 장계에서 조선군이 부산 왜영에 방화를 한 일시와 방법, 적의 피해상황까지 자세히 기록한 장계는 누구의 장계인가? 정답은 이순신의 장계이다. 이순신의 장계는 방화 전후의 상황이 자세히 보고 되고 있지만 김신국의 장계는 이순신의 부하가 아니고 실은 허수석이 했다는 소리만 있을 뿐, 정작 어떻게 작전이 실시되었는지는 허위 보고라는 이순신의 장계보다도 부실하다. 게다가 김신국은 자세한 내용은 이원익의 서계에 있다고 하는데, 정작 이원익은 자세한 건 김신국이 알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쯤 되면 과연 누구의 장계가 허위 보고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과연 이순신의 장계는 기망장계인가?

 방화 작전이 누구의 작전이든 그 시기는 1595년 12월 12일 임이 확실해 보인다. 이순신은 자신의 부하가 실시한 작전이라면 기상상태 등으로 부산에서 한산도로의 도착이 늦어진다 해도  20일을 전후해서는 보고를 받았을 듯 하다. 20일을 전후하여 장계를 작성하였다면 27일 무렵에는 조정에 도착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럼 김신국은? 그는 한양에 있다가 12월 25일에야 적군 상황에 대한 논의 등을 도원수 등과 의논케 할 목적으로 파견할 것이 결정된다. 김신국이 너무 성실해서 25일 당일에 출발해 최대한 빨리 간다고 해도, 29일이나 30일이나 되어 남쪽으로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이 장계를 올린 사실을 알고 방화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시간, 다시 서울로 장계를 보내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25일에 파견이 결정된 그가 1월 2일에 진상보고를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김신국이 얘랑 동족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김신국이 점퍼가 아닌 이상 한양에서 이순신의 장계를 알고 자신도 장계를 올렸다는 것인데, 그가 무슨 천리안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도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는 거다. 그런데 그 들은 이야기에 기반한 상소가 이순신 상소보다 빈약하다면? 그나마 김신국와 이원익이 서로 자기는 자세히 모르고 상대가 안다고 말하고 있다면? 누구의 상소가 더 신뢰감 느껴지는가?

 그리고 또 하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이순신의 장계가 거짓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순신이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라, 자신도 부하에게 허위보고를 받은 걸 검증 안 하고 올린 게 된다. 단순히 확인 안 해보고 속은 죄로 이순신이 하옥되었다면, 상관을 속인 안위와 김난서, 신명학 역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안위는 무려 정여립의 친척이었다.  정여립 사건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것은 안위가 살아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한 일인데, 역적의 친척이 허위보고를 했는데 무사했다는 것은 결국 안위와 김난서 등이 허위보고를 한 게 사실인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게 한다.

 보다 결정적으로 중간 과정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金鸞瑞)와 안위(安衛)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라고 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결국 조정이 이순신의 장계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 이순신이 허위 보고를 한 것으로 죄를 몰아붙일 수 없자 선조는 이번에는 이순신이 안위의 공을 가로챈 것인양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이순신의 장계 내용은 요약하자면 “안위랑 김난서랑 신명학이 이런 공을 세웠습니다.”라는 것이었으니, 공을 가로채려 했다는 말도 부적절하다.

 결국 이런 모든 일들을 고려할 때 이순신은 기망장계를 올린 적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순신은 분명 안위 등이 직접 실행한 작전에 대하여 보고를 받고, 사실대로 장계를 올린 것이다.  앞뒤 상황과 기록을 비교해 볼 때, 허위보고를 한 이는 이순신이 아니라 김신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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