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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하십니까"와 촛불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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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의 열기는 2008년의 광우병 촛불시위를 연상케 한다. 그 시절 광우병 촛불시위는 그야말로 ‘온갖 목소리의 향연’이었다. 인터넷 논객 박가분은 <일베의 사상(2013)>이라는 책에서 2008년의 광우병 촛불시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내 생각에 2008년의 촛불시위를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등장으로 의미 부여하는 모든 담론들 역시도 똑같은 ‘소극’이었다고 본다. 당시 진보좌파 지식인들은 200년의 사건에 유달리 획기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중략) 그러나 촛불시위에 대한 수많은 성격 규정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역으로 2008년 촛불시위의 아젠다가 근본적으로 모호했다는 것, 지식인들의 저 촛불시위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찾았던 것처럼 촛불시위에 참여한 개개인들 역시 자신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출발한 촛불시위가 곧 ‘정권퇴진 운동’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하나의 의제로 정리될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급기야 촛불시위는 저마나 누가 뭐라 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자율적인 연설의 공간으로 자립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쇠고기 추가 협상을 약속한 이후에는 자신들이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나왔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축제의 장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느낌으로 시위를 지속했던 것이다.”

- 박가분 著 <일베의 사상> 214쪽

위 관점을 따르면, 2008년의 사건과 2013년의 사건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단순화시켜봤을 때 2008년의 원인에는 한미 FTA 문제가 있고 2013년의 원인에는 코레일 노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문제들은 각각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고려대학교 학생의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통해 의제 폭발의 효과를 얻었다.

이러한 동일한 구조와 더불어 공통점 또한 두 가지 지닌다. 첫 번째는 폭발된 의제가 ‘SNS’라는 파이프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국 온라인이 아닌 거리의 정치, ‘집회’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위의 인용된 단락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나의 의제로 정리될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강준만 교수가 얘기하는 ‘홍수 민주주의’처럼,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문제들이 ‘기회는 이때다’ 식으로 일거에 쏟아져 나옴으로써, 현 정권이 퇴진하면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알량한(?) 믿음을 갖게 한 것이다.

이처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 결과 역시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열망-좌절의 사이클’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즉 촛불시위의 열망은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현실적이고도 핵심 기제인 ‘정당’으로 조직화되지 못 했기 때문에 단지 시민사회의 뜨거운 목소리로만 남은 채로 끝내 식어버리고 좌절로 끝난 것이다.

만약 2008년의 여러 의제들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조직체가 있었다면 충분히 기존의 정치 구도(보수 양당 독점 상태)에 균열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정치는 정당 간의 올바른 의회정치의 모습이라기보다 진영 논리, 팬덤 정치에 빠진 ‘그 쪽이냐 이 쪽이냐’,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싸움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시민들의 뿌리깊은 환멸감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제3의 정당이 존재했더라면, 해묵은 구도에 균열을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정당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문제는 이처럼 쏟아져 나온 의제를 당 강령에 적극 반영하여 자신들의 현실적인 집권 플랜을 기획했다기보다, 그저 이러한 ‘열기’만 끌어다가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시킬 땔감으로 이용한 것에 있다. 이러한 비판은 오로지 ‘反이명박근혜’로만 먹고사는 민주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함께 하자’, ‘들어주겠다’고 해놓고 정작 의회에 들어가서는 딴청 피우는 식이었다.

이미 기존의 보수-진보라는 구시대적 진영논리로 현 국민들의 목소리를 오롯이 다 담아낼 수 없다. 이 시점에서 2012 대선에서 안철수 현상이 가졌던 의미는 중요하다. 쉽게 말해 국민들은 ‘성장’과 ‘복지’ 두 가지 모두를 원한다. 그리고 이는 ‘공정’이라는 코드를 통해 해결가능하다고 믿는다. CEO 안철수가 공정한 기업 경영 방식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다는 신화는 우리에게 ‘천민자본주의만이 자본주의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그 믿음이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안철수는 자신의 위치 설정에 있어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하다. 최장집 교수의 중도하차는 분명 자신의 잘못된 행보에 대한 유의미한 경고가 되었을 텐데도 말이다. 과연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사람들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일까. 그는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최 교수가 누차 얘기했듯, 신생 정당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양 끝으로 하는 직선의 가운데가 아닌 삼각형 구도의 나머지 꼭지점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철수는 보수 양당 체제의 기반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고, 바로 그 신생 정당의 주축이 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은 박근혜가 퇴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이게 다 〇〇〇 때문이다’라는 유행어를 잊었는가. 이대로라면 그 유행어는 빈칸 속의 이름만 바뀐 채로 영원히 써먹을 만고의 히트 아이템이 될 것이다. 한국 정당 구조의 고질적 문제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을 간과한 채로, 모든 책임을 대통령 1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쉬운 만큼이나 속은 시원할지도 모르겠으나 궁극적인 해결책 또는 현실적인 대안이 되진 못 한다. ‘진보 집권 플랜’이라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단순히 ‘그렇게 사니까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식으로 타박해서도 곤란하다. 지금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끊은 이유는 ‘열망-좌절의 싸이클’이 끝을 모르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촛불 백날 들어봐야 대자보 백 만장을 써봐야 결국 바뀌는 건 없더라는 얘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개인이 ‘어차피 구조는 바뀌지 않으니, 정해진 룰 안에서라도 최선을 다 해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이미 지금 20대는 대학 입시를 거치면서 ‘입시구조를 비판하는데 시간을 쏟느니 일단 수능부터 잘 치고 보자. 어차피 남들 가만히 있는데 나만 떠들면 손해 아닌가’라는 식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해온 세대 아닌가. 그들도 20여년 살아보니 그 길이 결국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의 첫 시작을 알린 학생도 국내 명문 사립대 고려대 출신이니 이를 모를리 없을 것이다.)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연대’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으니 결국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청년 계층의 일부가 나머지 청년 계층의 전부를 이기적이라고 매도하는 구조는 일부 ‘깨어있는 시민들’이 나머지 모든 시민들을 ‘소시민’으로 취급하고 계몽하려 드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다. 소위 깨시민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남보다 더 많이 알고있고 진리의 담지자 혹은 선지자쯤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SNS가 이를 더 심각한 수준으로 만든 것 같다. 이에 대해 안철수와 토크 콘서트를 함께 했던 박경철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SNS의 약점은 역설적으로 ‘대중성의 부족’에 있다. 기본적으로 SNS는 온라인상의 친분이 우선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들만 반응한다. 때문에 SNS상에서 나의 견해는 늘 옳은 것처럼 보인다. 관계를 맺지 않은 대중들이 모두 자유롭게 반응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집중적이고 확산성이 강한 SNS는 정작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동종 교배가 일어날 수 있는 폐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략) SNS에서 오가는 담론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며, 한 가지 견해를 두고 모두가 옳다고 착각하는 ‘무오류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 박경철 著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338~339쪽

거리의 정치는 분명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혼자 집에서 컴퓨터로만 확신하던 나의 동지들과 오프라인에서 재회하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진정한 연대란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다. 문제의식은 공유하지만 집회에 나설 의지가 부족한 중도지지층과 함께 하는 것은 그 출발이 될 것이고 기존의 보수 양당 독점 체제가 담아낼 수 없었던 정치적 무관심층과의 연대는 핵심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연대의 확장은 집회 규모의 확산으로도 이어질 것이고, 이는 문제점의 ‘크기’를 눈으로 확인한 보다 많은 시민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동종 교배가 일어날 수 있는 폐쇄성’, ‘무오류성의 함정’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거리의 열기가 종국적으로 신생 정당을 통해 의회 정치로 진입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미 커다란 변화의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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