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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일의 고서박물관- 성암고서박물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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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칠순이 넘으신 최근 알게된 조병순 교수님.

역시 행동하는 지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분. 홈페이지가 없어서 안타깝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란 곳에서 발행하던 잡지중 2006년자 현장르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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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일의 고서박물관

 

국가나 기업이 아닌, 개인이 세운 사설 박물관은 한결같이 유달리 찾기가 힘들었다. 무턱대고 이 근방 어디겠지 하고 주소만 들고 찾아 나섰다가는 낭패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고 114 안내 컴퓨터 전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성암고서박물관도 그러했지만 한국자수박물관은 백미터도 안 떨어진 동사무소에서조차 모르고 있었고 동사무소직원은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의외라는 듯이 그 번지수에는 건물이 세동이나 있다는 말과 함께 어디 시내 중심에 그런 것이 있겠는냐고 반문했다.

 활자, 종이, 옛 서적 등 전통 인쇄문화와 서지학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를 수집, 소장하고 있는 성암고서박물관은 공화문통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중심으로 한참 헤매다가 세종문화회관 별관 옆 골목을 들어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앞 태성빌딩에서야 찾아내었다. 주소가 중구 태평로 1가 60-17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태평로가 큰 길 양옆을 말하는 것이었고 옛 서적과 옛 교과서 등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면서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를 경영하는 여승구 사장마저도 프레스센터, 즉 서울신문사 뒤쪽 어디쯤에 성암고서박물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이었다. 여승구 사장, 그는 제1회 세계희귀도서전시회도 열었고 스스로도 개인 박물관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설마 그 도서관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을 리가 없으려니 하고 믿었던 게 탈이었다.

결국 파출소를 거쳐 번지수를 확인하고 찾아간 성암고서박물관은 의외로 가까운 데에 위치해 있었고 연륜만큼이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또한 옛 서적을 필요로 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알음알이로 썩 잘 알려져 있는 곳이라는 것도 거기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도심의 한복판인 코리아나호텔 뒤쪽(조선일보사 후문 옆)이 되는 이 태성빌딩은 6층에다 박물관을 차려 놓았고 건물 관리 사무소가 그 곁에 있었다. 예순다섯 나이의 관장 조병순씨는 최근에 增修補註三國史記를 펴내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사람인데 이 삼국사기는 그가 수집했던 여러 본의 삼국사기를 일일이 한자 한획을 비교해 올바르게 고쳐 주석을 단 귀중한 책이다. 그래서 그간 잘못 해석되고 연결이 되지 않던 삼국사기는 그가 펴낸 이 <증수보주삼국사기>로 거뜬히 제 모습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다시 쓰기 위해 삼국사기의 여러 본은 물론 삼국유사, 기타 일본서기, 고려사 등을 일일이 찾아 헤매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가친에게서 한학을 배운 것이 고서에 미쳐 책귀신이 된 동기라고 말하는 조 관장은 그동안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고서들을 보관해 오던 중 20여 년 전 한문 폐지 움직임과 함께 고서들이 마구 헐값으로 고물상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본격적으로 고서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건축학을 전공했던 조 관장은 당시 해외건설 붐을 타 성공적으로 진행되던 건축업을 내던지고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옛서적들을 찾아 삼남 곳곳을 뒤졌고 미국·일본은 물론 유럽까지 헌책 등을 찾아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 그 결과 10여년 동안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드디어 1974년 11월 6일 자기 건물인 이 태성빌딩에 50여 평의 한국 유일의 개인 고서 박물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성암고서박물관은 1년여의 공사기간을 들여 조 관장이 직접 설계, 건축하였으며 50여 평의 전시장과 별도의 서고, 열람실 등을 갖춘, 작지만 과학적으로 짜여진 박물관이 된 것이다 (주: 국내유일의 고서박물관으로썬 협소하지 않을까- 누군가 도움을 줘서 규모와 시설 (특히 보존면에서) 을 더 갖추면 좋겠다).

은은한 한지 냄새와 함께 잘 정돈된 고서, 고문서들이 유리 진열장에 소중히 간직되어 옛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이 박물관에는 약 3만여 점의 고서적과 약 2만 5천 점의 고문서, 약 1만5천 점의 기타자료가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국보가 3점, 보물 16점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 희귀본 자료들 중에서도 국보 149호로 지정된 <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卷六과 <高麗本三國史記> 7권(44권∼50권)은 대표적 희귀 소장본 중의 하나이다.

총 4천5백여 종의 방대한 고서들 중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많은데 국보급과 맞먹을 고서들을 살펴보면 <북사상절>외에도 고려 때의 <初雕大藏經版>, <御製秘藏詮> 卷六과 <비장전>, 사이에 새겨진 목판화 4점, 그리고 <팔만대장경>의 제작을 총 지휘, 감독하던 守基스님의 <화엄경>과 <화엄경>의 표지 뒤에 그려져 있는 變相圖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국보들 중에는 앞서도 잠깐 언급을 했던 고려본 <삼국사기>가 있는데, 이 <삼국사기>는 우리 한국 고대사 연구의 절대적인 기초자료였던 正德本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서 조 관장이 15년전 고서점가에서 구입하여 10여년 간의 연구와 5년간의 집필을 통해 거의 완벽하게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이 정덕본에다 왜곡시켜 놓은 144군데를 포함 1,904개의 오자, 18,269개의 탈자 및 누락된 곳을 바로잡았다)

<어제비장전>의 목판화 4점 역시 국내미술사에 처음으로 공개된 자료로써 단절되어버린 고려시대 회화사의 한 공백을 메우는데 커다랗게 기여한 것들이다. 위로는 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들에게 고루 평등한 법(光)을 나누어 주고있는 승려들을 묘사한 이 목판화들은 北宋本에 그 각인의 바탕을 두면서도 섬세하고 정교한 독자성을 잃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 판화의 이러한 독자적인 기법은 고려 전기의 우리 미술은 물론 인쇄문화와 불교문화 및 불교문화사 연구에 종래의 소홀했던 측면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한 것들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희귀본 하나하나가 발전되기까지는 한달 동안 전국 10만km를 헤매는 정열과 그에 따른 인고의 피와 땀,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행운이라는 걸 묵과할 수 없다. 10만km라는 이 거리는 지구를 두바퀴 반을 도는 거리이고 그 덕에 코로나 택시 몇 대를 폐차시켜야 했지만, 휴지공장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녹아 없어질 뻔한 목판 <삼국사기 고려본>이나 김 인후의 초상을 담은 동판화 등은 코로나 몇 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우리 모두의 귀중한 유산들이다.

그래서 이곳에만 있는 학술적으로 뛰어나고 귀한 보물들에 대해 국내외의 고서적 관계 학자는 물론 우리나라를 연구하는 수많은 일본·중국의 사학자들은 감탄과 부러움을 함께 느끼고, 일본에서 왔다는 어느 학자는 벌써 몇 개월째 발을 묶고서 이곳을 찾고 있다.

열람만 가능한 이 박물관에는 한달 평균 50여명이 다녀간 셈이다. 재작년에 개최된 ICOM(세계박물관 협회)총회 때에는 세계의 박물관 관계자들이 이곳을 단체로 다녀갔고 작년 5월에는 이 협회의 기관지 <뮤지움(museum)>에 특집으로 이 박물관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전시장에는 활자 및 인쇄자료 등이 대표적인 것만으로 1백여 점 전시되고 있는데 고서들은 입구에서부터 활자의 주조연대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癸未字本>은 歷擧三場文選對策이 <庚子字本>은 주로 세종조의 것인 漢書(班固撰)가 甲寅字本은 <補註李太白詩>가 丙辰字本은 중국 쪽의 역사기록을 주체적으로 계수한 <資治通鑑綱目>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각 주조연대의 대표적인 고서들이다. 아무튼 이렇게 고서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해 놓음으로써 전문가들이 아니더라도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활자의 변화와 책의 형태, 책 크기의 변화 등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한편 서책들과는 달리 책자의 본래 의미를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는 竹簡과 두루마리로 된 책(卷)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희귀한 전시품인데 죽간은 길이 20cm, 가로 0.4cm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대쪽에 사서삼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당시에 종이가 귀했던 관계로 종이장보다 더 얇게 깎은 이 죽편에 사서삼경의 구절들을 일일이 붓으로 써넣어 이를 죽간통에 넣어 책 대신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이는 선비들이 오늘날의 카드처럼 이 죽간을 사용했으며 죽간통 하나에는 1만개가 넘는 죽편이 담기게 되고 죽편1만개는 사서삼경의 모든 구절을 기록하고도 남는 분량이었다고 하니 가히 경이적인 집중력이라 할만하다.

活字는 木활자 10점, 銅활자 21점, 鐵활자 10점, 陶활자 21점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고활자는 고려시대의 도활자 18개로써 이는 국내에 몇 안 되는 희귀한 것들이다. 활자 중 특이한 것들은 금속활자들로써 활자 밑부분에 다리가 있어 활자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식자하던 다른 활자들과는 달리 밀랍을 녹여 만든 석자판에 다리를 꽂아 교정과 교열을 손쉽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임진왜란 이전의 금속활자들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 까닭은 임진왜란 당시 가등청정에 의해 금속활자들이 깡그리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고려시대의 금속활자가 국립박물관에 단 1개(몇 년 전 출토) 남아 있는데 그것도 다리가 없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조 관장은 이 고려 때의 금속활자를 추적해 일본, 유럽 등지를 헤매었으나 찾을 길이 없었고 단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박물관에서 1개를 발견했으나 찾아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박물관의 한구석에는 영원히 없어져버릴 시련에서 돌아와 우리 앞에 한없는 감격으로 서 있는 은인장 하나가 있다. 이 도장은 바로 세종대왕의 三拱之印의 하나인 宣賜之記(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책에 찍는 직인이며, 국왕의 상징인 옥쇄 다음 가는 소중한 보물이다)인데, 이것의 발견 또한 극적이다. 많은 서책의 권두에 붉은 날인으로만 남아, 대강의 모습만을 짐작케 했던 선사지기가 발견된 것은 청계천변 어느 헛간에서 망치대용으로 사용되다 그야말로 '행운'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온 몸에 못대가리와 부딪힌 곰보자욱의 이 은인장의 출현은 반가움에 앞서 슬픔을 주었고, 그 슬픔에 앞서 또한 역사의 참뜻을 깨우쳐 주었다. 또한 이것은 조병순 관장의 피나는 노력이 바로 이러한 것으로 꽃피우고,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 시대에 이러한 박물관이 있어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에 있게 된 셈이다.

"예초에 영리적인 목적과는 인연이 먼 일이었어요. 자료들을 모으다 보니 이것이 개인이 혼자 소장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학자들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박물관을 일요일과 공휴일을 빼놓고는 연중무휴로 개방해 놓고 있으나 국내학자들의 이용률은 그리 놓은 편이 아니라고 조 관장은 안타까워했다. 오히려 일본 동경대학 교수들이 장기체류를 하면서 우리 자료들을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며 국내 학자들은 안병희, 손부기, 천혜붕, 임창순 교수 등이 이 박물관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분들이라고 한다.

성암고서박물관은 도시 한가운데 있으나 옛것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보물 창고이다. 단지 귀하고 값나가는 물건이 정리 보존되어 있어서라기보다 단절되어버린 옛 역사의 맥과 전통을 이어주는 회랑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암고서박물관은 바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역사적 셈이다. 더구나 이 맥을 한 개인이 잇고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것에 앞서 혼신의 힘을 쏟아 역사를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고마움과 경건함을 가져야 될 것이다.

위치 : 시청역 조선일보사 신관앞
전화번호 : 02-725-5227
개관시간 : 오전9시~오후5시
입장료 : 무료

원문링크:

http://www.arko.or.kr/zine/artspaper86_05/19860515.htm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매거진, 2006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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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학자들의 개별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력으로 우리의 역사가 조금씩이나마 발굴되고 보존되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저렇게 시골어디선가 썩어갈 혹은 무지하게 없어질 유물/유적들의 중요도를 파악하기 힘든 '일반인'들이 손쉽게 보고 혹은 알릴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 개인의 노력으로 찾을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일테니까. 문화재청에서 많은 언론 홍보와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눈을 잘못가진' 도굴꾼이나 문화재범죄자들이 학자들보다 먼저 찾아내기 전에, 국민들이 '보고'할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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