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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6)- 신라 35호 금입택 (金入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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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금입택을 다루기에 앞서, 아직까지 이 저택들에 대한 상세한 고고학적 발굴이 부족한 관계로 문헌사료에 많이 의존할수 밖에 없고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하는 개념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건축들이라는 점을 상기하시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라 금입택 39채와 계절유택 4채

[삼국사기] 880년 (헌강왕 6년) 가을 (9월 9일)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경주)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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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넷상의 많은 정보들에 자주 '삼국유사'의 기록이라는 오기가 있는데, '삼국사기'로 모두 바로잡아야 할 듯 합니다. 이 기록에서 특히 귀족의 집들이 아니라 '민간'이 기와집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록이 '삼국유사'에는 없을까요?  사실 이 기록과 [삼국유사]의 헌강왕대 기록은 아주 비근합니다. 삼국유사 중 [처용랑과 망해사 조] 부분에 "헌강대왕때에는 서라벌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해 있고 초가는 없었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또한 바로 뒤에 소개할 사절유택 조 바로 뒤에 "제 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성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래소리와 피리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라고 덧붙입니다. 참고로 이 기록은 아래 원문그림이 가장 왼쪽에 보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시대와 묘사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대화체' 묘사는 삼국사기의 것이니 바로 잡아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묘사의 앞부분 [삼국유사 권1]에 35 금입택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아래 사진의 괄호부분이하입니다.
三十五金入宅 言富潤大宅也 삼십오금입택 언부윤대택야

뿐만 아니라 이 저택들의 이름도 하나하나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남택(南宅)
북택(北宅)
우비소택(亏比所宅)
본피택(本披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 - 본피부)
재매정 택(財買井宅 - 김유신의 조상집祖宗)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 - 반향사(反香寺)하방(下坊)
대택(隊宅)
빈지택(賓支宅 - 반향사 북쪽)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楊上宅 - 양부의 남쪽)
한기택(漢岐宅 - 법류사法流寺 남쪽)
비혈택(鼻穴宅 - 법류사 남쪽)
판적택(板積宅- 분황사芬皇寺 상방上坊)
별교택(別敎宅 - 개천 북쪽)
아남택(衙南宅),  김양종택(金楊宗宅 - 양관사梁官寺 남쪽)
곡수택(曲水宅 - 개천 북쪽)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 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 亏所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
임상택(林上宅- 청룡靑龍이란 절 동쪽이니, 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항질택(巷叱宅 - 본피부)
누상택(樓上宅)
이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 

제목과 다르게 여기 등장하는 저택들은 35채가 아니라 총 39채입니다. 때문에 부명(部名)을 갖는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본피택(本彼宅), 한기택(漢岐宅) 등 4개의 금입택은 왕실의 이궁(離宮)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또한 헌강왕대 (9세기)의 기록이지만 금입택은 신라 말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고, 이미 중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유신(金庾信, 595 ~ 673년)의 종가로 짐작되는 '재매정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금입택의 기록 바로 다음에 당시 통일신라 수도의 '별장'이 네 채 소개됩니다. '사절유택(四節遊宅)', 즉 계절마다 머무는 집으로, 정말 흥미롭게도 '사계절'에 한채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그리고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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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입택의 경제력

이 저택들이 정말 '금박'을 입힌 황금저택들인지, 혹은 '황칠'을 한 저택인지, 아니면 '쇠'를 많이 사용한 의미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후 좀 더 이 부분은 살펴보기로 하지요. 다만, 극히 화려한 당대최고 수준의 저택들임은 틀림없겠습니다. 예컨대 이 저택들의 경제력과 '금'의 보유량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바로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의 보희선사 비문입니다.
宣帝十四年 仲春, 副守金彦卿, 夙陳弟子之禮, 嘗爲入室之賓, 減淸俸出私財, 市鐵二千五百斤, 鑄廬舍那佛一軀, 以莊禪師所居梵宇. 敎下望水里南等宅 其出 金一百六十分, 租二千斛, 助充裝飾功德, 寺隷宣敎省
唐 宣帝 14년 2월 副守 김언경은 일찍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문하의 빈객이 되어 녹봉을 덜고 사재를 내어 철 2500斤을 사서 로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敎를 내려 望水, 里南宅 등도 金 160分, 租 2000斛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 가지산사는 宣敎省에 속하게 하였다

신라 헌안왕(憲安王) 4년, 즉 860년에 왕이 금입택중 하나인 수망택(水望宅)과 이남택(里南宅)  택주에게 하교해 금 160근과 조 2,000곡(斛)을 보림사에 시주할 것을 명했다는 기록이 이 비문에 적혀 있습니다. 이 두 금입택은 위의 삼국사기의 상기 리스트에 등장하는 저택들입니다. 이 두 저택이 보림사에 기부한 2,000곡은 당시 토지 1,333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습니다. 또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근의 무게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성덕대왕신종의 무게인 18.9톤을 통해 유추하면 중국 한대(250g 내외)와 유사한 약 250g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 160근은 현재로 약 40킬로그램의 양입니다. 한 저택이 시주로 그만큼의 '순금'을 시주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 경제력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860년의 기록은 가장 앞서 살펴본 삼국사기의 880년 경주시가지의 모습과 20년차이가 납니다 (다만 사진자료에는 884년으로 나오는데 오차가 왜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비문기록은 당대경주의 번성함이 다만 헌강왕때만이 아니라 9세기 전반에 걸쳐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삼국유사 권4 백엄사(伯巖寺) 석탑사리조(石塔舍利條), 946년]에는 백암사는 '북택(北宅)'의 자리에 창건한 사찰이라고 되어 있어 사찰하나를 만들 정도의 저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관청 廳'자로 보아 원래 귀족의 집을 후일 '관청'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但古傳云前代新羅時北宅廳基捨置兹寺中間久廢去丙寅年中沙木谷陽孚和尚攺造住持丁丑遷化
다만 고전(古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앞 왕조인 신라 때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더니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고, 지난 병인년(丙寅年 ; 1026)에 사목곡 (沙木谷)의 양부화상 (陽孚和尙)이 고쳐지어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丁丑 ; 1037)에 세상을 떠났다.

이 백엄사터에 대한 최근 보고서를 들여다 보면 상당히 큰 사찰터였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위치가 경주가 아닌 합천군이라 몇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기록 외에 백엄사에 관해 전하는 기록이 없어 그 정확한 위치와 현황을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의 백암리 일대가 백엄사 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일대에 대하여 2006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와 함께 현장설명회가 이루어졌는데, 1차 발굴조사에서는 금동불입상과 청동제 사리구(舍利具), 금박편(金縛片), 막새 등 와전류(瓦塼類)와 청자편(靑磁片)이 출토되었고, 건물의 구조와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초석(礎石)과 3동의 건물지(建物址), 기단석열(基壇石列), 배수로(排水路) 등이 드러났다.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진 조사였으나 확인된 유구와 주변지역의 방치된 건물부재(建物部材)와 석재(石材) 등으로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택(池宅)의 경우 891년 당대의 금석문인 "全南 潭陽郡 南面 鶴仙里 開仙寺址"에 등장하는데 토지의 규모를 알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설도 (한자가 달라) 있으나 아래 나오는 烏乎比所里 역시 35금입택 중의 하나인 우비소택 (亐比所宅)에 비정하기도 합니다.

龍紀 三年 辛亥 十月 日僧入雲 京租 一百碩 烏乎比所里 公書俊休 二人 常買 其分 石保坪 大業 渚沓 四結 五畦 東令行土 北同」土南池宅土 西川奧沓 十結 八畦東令行土西北同」土南池宅

龍紀 3년(실은 大順 2년, 眞聖女王 5년, 891년) 辛亥해 10월 어느날 승려 入雲은 서울에서 보내 준 租(혹은 서울에 보내야 할 租) 1백 석으로 烏乎比所里의 公書와 俊休에게서 그 몫의 石保坪 大業에 있는 물가의 논 4결 (注: 논은 5뙈기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令行의 토지이고 북쪽도 마찬가지다. 남쪽은 池宅의 토지이고 서쪽은 개울이다) 과 물가로부터 멀리 있는 논 10결 (注: 논은 8뙈기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令行의 토지이고 서쪽과 북쪽도 같은 토지이다. 남쪽은 池宅의 토지이다)을 영구히 샀다.

또한 9세기당대 장사택(長沙宅)의 경제력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앞서 나온 장흥 보림사의 858년 또다른 금석문인 '불상조성기'에 장사현의 부관 '김수종'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조상기(寶林寺 鐵造毘盧舍那佛坐像造像記) (헌안왕 2년, 858)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 때는 정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헌안왕 2, 858)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진주하여, 情王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여기 나오는 "수종 이간(水宗 伊干)"은 신라 제54대 경명왕비인 장사택(長沙宅)의 조부로 김씨라고 나옵니다. 그의 아들은 성희대왕(聖僖大王)으로 추봉된 대존 각간입니다. 이기백 교수의 논지 (1978)에 따르면 "장사택의 택호(宅號)도 장사현(長沙縣)의 지명(地名)에서 연유한 듯 하다. 장사택은 신라의 35개 금입택(金入宅)의 하나였음으로 미루어 보아 수종 이간의 가문은 택주(宅主)로서 부호(富豪)일 뿐만 아니라 왕권에 비견될 만한 유력한 귀족이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때 보림사 바로자나철불은 무려 2,500근의 철로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각종 금석문들의 교차발견은 이 저택들의 실존과 경제력을 확실하게 말해줍니다. 


아랍권의 사료들 (9~ 12세기)
과연 이 저택들은 금으로 만들어졌을까요? 그리고, 당대 경주의 모습은 정말 저런 모습이었을까요?
이는 해외사료들의 교차검증에서도 어느정도 확인되는데, 흥미롭게도 아랍권의 사료들에서 당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9-10세기의 아랍의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알 라지(854~932)의 사료를 후대인물인 알 카즈위니 (뒤에 나옵니다)가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新羅는 살기 좋고 利點이 많으며 金이 豊富하기 때문에 일단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定着해서 떠나지 않는다. 알라만이 施惠者이시다 (신라는 살기 좋고 이점이 많으며, 금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 알라만이 시혜자이시다)."

알 라지의 기록은 880년, 즉 삼국유사의 금입택기록과 일치하는 바로 그 당대입니다. 따라서 '금이 풍부하다'는 이 사료의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약간 후대인 10세기 인물로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아마도 '금입택'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단서를 966년 그의 저서인 [창세와 역사서(Kitabu‘l Badi Wa’d Tarikh)]에서 적어두고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이보다 약간 후대인 12세기초의 저자 알 이드시리(Al Idrisi. 1099~1166)는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Nuzhatu‘l Mushtaq fi Ikhtiraqi’l Afaq: 일명 로제타의 書]에서 믿기 힘든 글을 남깁니다.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주: 원숭이의 목테라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알 이드리시는 무왓하딘조, 즉 현 모로코의 지중해 연안도시인 사브타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6살 때부터 안다루스(스페인)-프랑스-영국-북아프리카-소아시아-그리스를 여행합니다. 그러다가 시칠리 왕국의 로저 2세왕(1130~1154)의 에게 지리서를 편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위원회를 조직해서 당시 지리학자 천문학자 화가 등 세계 각지로 보내 자료를 수집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이렇게 고생끝에 긴 시간인 만 15년에 걸쳐 만든 책이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으로 1154년 사망직전에 로저 2세에게 전해집니다. 이 책은 굉장한 정밀도를 가진 지도로 유명해 당시까지의 어떤 지리서도 필적할 수 없는 지리서로 선택되어 17세기부터 라틴어로 번역, 중세 지리서의 표본으로 유럽의 각대학에 교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신동아 참조링크).

조금 더 후대의 기록도 있습니다. 알 카즈위니(Al Qazwini)는 고려대의 인물로 1203년 출생해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한 사학자로 현재 이란의 카즈윈 시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가 집필한 [제국유적과 인류소식 (Atharu'l Bilad wa Akhbaru'l Ibad.)]이라는 1250년의 저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新羅는 中國의 맨 끝에 있는 絶好(궁극적(ultimate)으로 좋은)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空氣가 純粹하고 물이 맑고 土質이 肥沃해서 不具者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龍涎香의 香氣가 풍진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疾病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疾病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完治된다 (신라의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다.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의 향기가 풍긴다. 전염병과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이 걸린 사람은 그곳에 가면 곧 완치된다)." 

물이 좋은 것이야 조선시대까지도 금수강산으로 유명했으니 기정사실이며, 용연향(龍涎香)이란 것은 향유고래의 장 안에 있는 회색 또는 갈색의 물질이며, 사향의 향기를 내는 향료로 당시에는 극히 귀한 재료였습니다. 이분은 신라인들의 '외모'에 대해서도 적어두어서 흥미를 자아냅니다. 
(新羅) 住民들은 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外貌 를 가지고 있으며 疾病도 가장 적다 (주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병도 적다)".

알 카즈위니의 이 책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때는 말씀드렸듯 이미 13세기로 고려말이기 때문에 신라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이슈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우선 동아시아와 관련이 깊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몽고제국의 침략으로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이 패망한 시대의 인물로, 여행을 엄청나게 많이 다녔던 인물입니다. 같은 아랍권 선배들의 천문학과 지리학의 성과를 당대 수많은 사료에서 모아서 집필한 것중 지리학과 관련된 2권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諸國 遺蹟과 人類消息](Atharul Bilad wa Akhbarul Ibad, 1250) 입니다. 

유럽을 포함한 세계 명지의 지리 지식을 집대성한 책인데 서문에서 무려 50명이나 달하는 아랍권 선학들의 지리서적을 참조해서 이책을 저술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기록이 신빙성을 가지는 것은 특히 '신라'부분에 그가 10세기 중엽 (즉 900년대중반) 인도와 중국등을 직접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부 달프 알 카즈라지(Abu Dalfi al-Khazraji)"라는 사학자가 쓴 [제국의 기적 (Ajaibul Buldan)]의 신라부분을 직접 인용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웃나라인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하는데 이는 오히려 금입택이 존재하던 당대기록 (9세기)보다 더 전대의 기록 (8세기초, 720년 완성)으로 중요성을 띕니다.
일본서기 중애기
眼念之金銀彩色 多在其國 是謂衾新羅- 눈부신 금은채색이 신라에 많다


이 모든 기록들은 8~10세기경 신라, 적어도 경주에 금이 매우 풍부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10세기 알 마크디시의 기록은 그대로 '금입택'을 묘사하는 듯한 기록입니다. 만약, 이 당대 아랍의 사학자들이 저술전에 경주를 직접 방문했다는 사료가 나온다면 이 기록들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 아랍권사료 부분은 필자가 직접 사료를 보지 않아 현재로썬 확실한 기록이라고는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후일 확인하는 대로 글을 첨가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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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흥미로운 기록, 그리고 금입택과 궁궐들의 위치

18세기의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 (星湖僿說)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인사문(人事門) 수뢰(愁牢)

방언(方言)에 차(車)를 수뢰라 하고 또한 단오(端午)도 수뢰라고 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의 서제(庶弟) 차득공(車得公)이 미행(微行)하여 무진(武珍 광주(光州)의 고호) 주리(州吏) 안길(安吉)의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서울 사람인데,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두 절 사이에 있고 이름은 단오(端午)다.”라고 하였다.

당시 국가제도에 외방(外方)의 주리 한 사람씩을 서울에 올라와 집무(執務)하게 했으니, 지금의 기인(其人)이 바로 그것이다. 안길이 당번(當番)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황룡사와 황성사 두 절 사이에 있는 단오의 집을 찾았으나,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한 노인이 “두 절 사이는 거의가 궁궐이니 단오는 차득공(車得公)일 것이오.”라고 했으니, 차(車)를 수뢰라고 이른 지가 오래되었다.

오늘날 기인(其人, 신라 말기의 중. 시호는 요공(了空))이 맡은 일도 대궐 안의 일용물품을 공급하는 것이니, 그 근원은 역시 신라로부터 전해온 것이다. 저 방언은 한때 이어(俚語)에 지나지 않아 아무 뜻이 없는 것인데도 오히려 이같이 오래 전해왔으니, 기인의 일이 내려오며 후세의 폐단이 되어 졸연히 혁파하지 못하게 된 것이 마땅하다. 수뢰(愁牢) 두 글자는 시가(詩家)들이 또한 운어(韻語)로 삼을 수도 있다.

이 기록은 두가지 면에서 큰 중요도를 가진다고 봅니다. 우선 '수레'라는 현대어가 '고대 신라어'일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신라 궁궐위치'에 대한 유추를 하게 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밑줄친 부분입니다. 18세기의 이 저서의 이부분의 원출전은 바로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 부분 발췌:
詰旦居士欲辭行時曰: “僕京師人也.
吾家在<皇龍> <皇聖>二寺之間, 吾名<端午>也.
[俗謂 “端午” 爲 “車衣” .] 主人若到京師, 尋訪吾家幸矣” .
遂行到京師, 居冢宰.
國之制, 每以外州之吏一人上守京中諸曹, 注, 今之其人也.
<安吉>當次上守至京師, 問兩寺之間<端午居士>之家, 人莫知者.
<安吉>久立道左, 有一老翁經過, 聞其言, 良久佇思曰: “二寺間一家, 殆大內也; <端午>者, 乃<車得令公>也.
潛行外郡時, 殆汝有緣契乎” .
<安吉>陳其實, 老人曰: “汝去宮城之西歸正門, 待宮女出入者告之” .
<安吉>從之, 告 “<武珍州><安吉>進於門矣” , 公聞而走出, 携手入宮, 喚出公之妃, 與<安吉>共宴, 具饌至五十味.
聞於上, 以<星浮山>[一作<星損乎山>]下爲<武珍州>上守繞木田, 禁人樵採, 人不敢近, 內外欽羡之.
山下有田三十畝, 下種三石, 此田稔歲, <武珍州>亦稔, 否則亦否云.

나는 서울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속언俗言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소." 그 뒤에 차득공(車得公)은 서울로 돌아와서 재상이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서 지키게 했으니 이것이 곧 지금이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 궁궐안)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비밀히 돌았을 때 아마 그대는 어떠한 사연과 약속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사실을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대는 궁성(宮城)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宮女)를 기다렸다가 말해 보오." 안길은 그 말을 좇아서 무진주의 안길이 뵈러 문밖에 왔다고 했다. 차득공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아 궁중으로 들어가더니 공(公)의 비(妃)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혹은 성손평산星損平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伐採)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씨 3석(石)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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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황성사(皇聖寺)는 삼국시대 지어진 것으로 전하는 사찰로 경북 월성군 서면 모량리에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월성군은 1989년 1월 1일, 경주군으로 개명했습니다. 황룡사와 이 황성사의 사이는 "大內"였다는 기록으로 보통 大內는 왕이 거처하던 곳을 말합니다 (즉 궁의 영역이지요).

황룡사와 황성사 사이지역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보통 신라궁궐의 전성기를 3기인 삼궁(三宮)시대로 봅니다. 이중 대궁(大宮)은 경주시 인왕동 소재 월성 내, 양궁(梁宮)은 남산 서북 쪽이고  사량궁(沙梁宮)은 월성 북쪽 (사량부)으로 대강 추정합니다 (정확한 발굴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진평왕 7년(585)에 3궁을 관리하기 위하여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고, 사량궁이 있던 사량부는 신라궁궐 최초의 궁궐인 '금성'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다만 금성은 박혁거세의 성지 '나정'옆에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한 유명한 왕자의 거처인 별궁 '동궁東宮'은 안압지에 있었습니다.

금입택들의 위치비정은 1984년 이기동교수의 연구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가 유명합니다. 이 연구에서 금입택은 진골귀족의 집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삼국사기등의 기록을 참고로 어떤 저택은 이궁(離宮), 즉 궁궐에 포함되기도 했음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宅'의 의미로 관청이 포함될 가능성을 시사한 후대연구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궁궐'들과 '금입택'들의 최근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연구등 현재까지의 문헌연구와 발굴결과로 위치를 한번 정리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성호사설에 나오는 황룡사와 황성사 '사이'에서 얼마만큼의 궁궐지와 금입택들이 나왔는지를 보면 앞으로의 발굴지 선정에도 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대 경주에서도 가장 중심부가 어디였는지 파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금입택중 현재까지 위치비정이 이 황룡사와 황성사 사이구간이 아닌 (불국사근방이나 남산 남쪽) 두세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 근방임을 알수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판적택(板積宅) : 『삼국사기』 권48 열전8 향덕(向德)전에서 향덕이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熊川州 板積鄕人)”이라고 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판적택이 판적향을 지방의 경제적인 거점으로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이기동, 1984). 판적택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세주에서 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분황사의 북쪽은 북천과 근접하여 건물이 배치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북천의 건너편에 위치한 동천동 삼성아파트부지 유적을 판적택과 관련시키고자 한 견해가 있다.(이은석, 2004) 한편 분황사의 동편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원지를 비롯한 거주지가 확인이 되어 판적택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분황사를 기준으로 상하(上下)를 남북(南北)이 아닌 동서(東西)의 개념으로 놓고 가정해 본다면 분황사의 동쪽의 구황동 유적이 상방인 판적택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서를 상하의 개념으로 대입한다는 것이 어색하며, 원지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판적택은 역시 북천의 북쪽에 해당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8)

* 재매정택(財買井宅) : 세주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의 조종(祖宗)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김유신 후손의 종가(宗家)로 설명한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이기동, 1984) 현재 경주시 교동 89-7번지가 재매정지(財買井址)로 전해지고 있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 교남택(橋南宅) : 명칭을 통해서 유명한 다리의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느 다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료를 통해서는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9 경덕왕(景德王) 19년(760)기사에서 “궁(宮)의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세웠다(又宮南蚊川之上 起月淨春陽二橋)”라는 내용이 유일하게 확인된다. 따라서 월정교와 춘양교의 남쪽에 위치한 경주시 인왕동 지역에 교남택이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이기동, 1984)

* 지상택(池上宅) : 세주에서 언급된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다는 설명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단, 『삼국사기』 권8 성덕왕(聖德王) 14년(715)조에서 “임천사(林泉寺) 못 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祈雨於林泉寺池上)”라는 부분과 연결해 보고자한 연구가 있다. 『삼국사기』 권10 헌덕왕(憲德王) 18년(826)에 “(헌덕왕이 죽자) 천림사(泉林寺) 북쪽에서 장사를 지냈다(葬于泉林寺北)”에서 보이는 천림사(泉林寺)와 임천사(林泉寺)와 동일한 사찰이고, 경주시 동천동 80번지의 헌덕왕릉 동남쪽 북천가에 임천사지로 전하는 사지가 있으므로, 지상택이 이 근방일 것으로 추정하였다.(이기동, 1984) 

* 본피택(本彼宅) :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 2년(662)조 기사 및 권39 잡지(雜志)8 직관(職官) 중(中)에 나오는 본피궁(本彼宮)과 관련될 가능성을 제기한 연구가 있었다.(三池賢一, 1971) 

* 사량택(沙梁宅) : (4)본피택을 본피궁으로 비정한 것처럼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진평왕(眞平王) 44년(622)조와 권39 잡지8 직관 중(中) 내성(內省)조 및 권48 열전8 검군(劒君, ?-628)조에 언급된 사량궁(沙梁宮)일 가능성을 언급한 견해가 있다.(三池賢一, 1971) 사량부 내에 있었을 가능성 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 아남택(衙南宅) : 명칭이 관아가 밀집한 지역의 남쪽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육부에서 중심적인 세력이었던 사량부(沙梁部)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이기동, 1984) 

본피부에 대한 비정으로는 미탄사 기록에 나오는 '최치원의 옛집' 기록이 중요합니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삼국유사에는 본피부로 나오나, 이상하게도 [삼국사기]의 최치원열전에서는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역사 기록이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집안을 알 수가 없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현재까지의 위치비정상 이건 오기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단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삼궁의 위치까지 현재까지의 자료를 하나하나 비정해서 지도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다음의 지도가 그것입니다. 사진이 잘리는데 클릭하시면 전체 지도가 나옵니다.
2014년 현재, 신라 3궁과 추정 금입택 일부의 위치 (황룡사와 황성사를 기준으로)

아래는 작년 제작된 9세기경 경주의 3D 재현도입니다. 오른쪽 위에 황룡사가 보이고 가운데 월성내의 대궁(大宮)과 아마도 북쪽의 사량궁(沙梁宮)이 있습니다. 그 위로 주작대로가 뻗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남천아래쪽의 금박건물군입니다. 우연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곳은 위의 지도에 비정한 금입택 중 '교남택(橋南宅)'위치에 해당합니다. 오른쪽 아래 다리는 월정교가 아니라 '일정교'입니다.
그리고 2007년 흥미롭게도 월성의 지하에 대한 물리탐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관련뉴스링크). 11개의 문과 대형건물지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는 앞으로의 발굴에 큰 도움이 됩니다.
같은 재현도에서 동궁東宮 (안압지 옆)
이와 달리 전에 그려졌던 복원도에서는 '대궁지'가 월성이 아니라 주작대로의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량궁의 위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주십사 하는 부분은 황룡사에서 45도 왼쪽 대각선으로 대강 내려오는 선에 걸친 궁궐지들과 저택지들입니다 (바로 '황성사'와의 사이, 대내 구간이지요).

필자가 만들어 본 현재까지의 위치비정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황룡사를 기점으로 월성, 그리고 남산의 동북쪽에 현재까지 많은 주요건물지들이 위치가 비정되거나 발굴조사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황룡사 바로 오른쪽에서도 큰 저택지가 발굴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글에 나오는 '황성사'에서 북서쪽 (즉 황룡사와의 사이)는 아직 큰 발굴이 이뤄지거나 한 적은 없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간에 대한 연구도 한번 해볼 가치는 있어 보입니다.

아직까지 고고학적 성과등 여러 정보가 더 필요한 '금입택'입니다. 하지만, 역사와 신화와 설화가 공존하던 신비로운 고대신라를 상상력으로 구현해보는 시도는 현재까지의 기록으로 충분히 해볼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예를 들어 금입택과 네채의 고대경주의 화려한 계절별 별장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을 그린 애니메이션등은 충분히 시도해 볼수 있겠지요 (관련글- 헤이안시대배경 컨텐츠와 삼국, 고려 천년공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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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으로: 이 저택들의 규모를 유추하는 정보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다음의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834년에 공포된 진골귀족의 옥사에 대한 제한 규정은 신라시대 건축 양식을 짐작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규정을 통해 귀족들의 저택을 상상해 복원한다면 (평균) 조선시대 상류 주택인 창덕궁 연경당(演慶堂)과 비슷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배치와 규모 및 골격도 연경당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덕궁 연경당- 평지규모만 이렇다는 것일뿐, 복층구조의 유무, 기와의 채색과 치미, 지붕의 모습, 그리고 각종 기둥양식과 정원모습등은 전혀 달랐을 겁니다. 간과해선 안되는 사실은 834년의 저 규정에도 불구하고 9세기말- 10세기에 이를 무시하고 큰 규모의 건축을 행하는 사례가 종종 나온다는 점입니다. 또한 834년의 옥사조의 정립(규제시작)은 반어적으로 그당시까지 이러한 규모를 벗어난 화려한 건축이 우후죽순 들어서 있었던 사회정황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따라서 연경당 규모설도 하나의 설일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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