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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4.4 대한극장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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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6년 4월 4일 대한극장 서다

 

전쟁이 끝난 뒤의 한국에서 헐리웃 영화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물론 한국 영화도 60년대의 전성기를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가슴을 녹여 주고 가난과 피로를 잊게 해 주었던 것은 홍수처럼 밀려들었던 헐리웃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애수>를 보면서 전쟁으로 찢어진 연인들의 슬픈 운명에 자신들을 대입시켰고 뒤돌아서 떠나는 총잡이의 뒤에서 “세인! 컴 백!”을 부르짖는 꼬마를 보면서 아련한 감상에 젖었다. 이런 수요를 위하여 뭔가 쌈박한 극장이 필요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시장 김형민(나와 이름이 같군)과 아들을 전쟁에서 잃었던 밴플리트 전 (前) 미 8군 사령관이었다.

 

1955년 서울 시장이었던 김형민은 서울 시민들의 문화 휴식 공간을 위해 극장을 세울 것을 결정했고 밴플리트 중장은 미국의 20세기 폭스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기 정화 시설을 가동시켰기에 창문이 하나도 없는,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건물이었던 대한극장이 1956년 4월 4일 탄생하게 된다. 그 좌석 시스템까지도 미국에서 직수입했고 2천석의 웅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대한극장은 개관 몇 년 후 70mm 대형 화면을 갖춘 국내 유수의 극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밴플리트 중장은 “대한극장에 10만 달러 융자를 주선해 주었는데 그 빚을 갚지 않는 바람에 보증인을 선 자신한테 빚 독촉이 왔다.”며 하소연을 한 일도 있었다니 (김운용 전 IOC 위원장 증언) 내막은 좀 더 복잡한 모양이다.

 

대한극장이 설 무렵은 한창 헐리웃에서 대작 영화 붐이 불 즈음과 맞물리고 있었다. 대한극장의 70밀리 ‘시네마 스코우프’는 여타 극장들의 기를 죽이는 위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같은 영화는 다른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했다. 오로지 대한극장에서만 오리지널 그 감동(?)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마 샤리프의 사슴같은 눈망울이 설원의 대지 위에 노을처럼 깔리던 영화 <닥터 지바고>도 대한극장의 스크린에 담긴다. 다른 극장의 스크린으로는 그 웅대한 영상의 맛배기를 도무지 담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좀 지루하긴 하지만 스케일 컸던 전쟁영화 <도라 도라 도라>도,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도 대한극장의 몫이었다.

 

대한극장의 성가를 있는 대로 드높인 영화라면 역시 <벤허>였을 것이다. 영화 시사 후 “오 하느님 이 영화를 진정 제가 만들었나이까?”라고 했다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탄은 그대로 영화 카피가 되어 포스터에 주먹만한 글씨로 나붙었다. 지금 보면 좀 조잡하긴 해도 미니어처를 동원한 열띤 해전(海戰) 장면과 실사로 찍은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주로 대표되는 이 불멸의 명화가 들어설 곳은 대한극장 외에 달리 없었다. (스카라 극장도 70밀리 스크린을 보유하긴 했는데 대한극장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았다) 서울 인구 300만에 훨씬 못미치던 시절 무려 70만 명의 관객이 대한극장 문턱을 닳게 만들었으니 그 열풍을 짐작할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한 극장에서 250만 관객을 동원한 셈이다.

 

그런데 대작 영화는 대개 그 러닝타임이 길다. 대작 영화를 즐겨 상영하던 대한극장은 매우 불미스러운 소동에 휘말리기도 한다. 1970년 1월 8일자 한국일보에 따르면 대한극장의 사장과 상무, 영사 주임과 기사가 줄줄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던 대작 영화를 잘라먹고 상영하다가, 즉 한 번 더 틀어 돈을 벌려는 욕심에 30분 가량을 잘라머고 상영하다가 들통이 나서 쇠고랑을 찰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 영화의 제목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당시 경찰은 <사운드 오브 뮤직>도 잘라 먹었던 혐의를 잡고 수사 중이라 했다.

 

이 영화는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대한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전, 마지막 70밀리 영상의 고별작으로 선택된다. 대한극장이 자랑하던 대형 화면을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상영됐던 그 영화를 보기 위해 나도 간만에 충무로 전철역을 찾았었다. 간만에 보는 피터 오툴, 앤터니 퀸, 오마 샤리프의 얼굴들은 지금도 선연하거니와 그날 나는 이름은 잘 모르겠으되 그 마스크는 여러 영화에 걸쳐 목격하여 분명히 익숙한 한 노배우가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최초 개봉되었던 1962년은 가히 충무로의 전성시대였고 대한극장이 그 독보적인 지위를 자랑하던 때였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라비아의 노련한 왕자 파이잘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이제 전쟁은 끝났소. 늙은이들끼리 협상을 했지. 젊은이는 전쟁을 좋아하지. 전쟁 속에서 희망과 자유를 추구하지. 그러나 평화는 늙은이들의 악덕으로 만들어간다오. 불신과 경계라는 늙은이들의 악덕 말이오.” 전쟁 영웅 로렌스에 대한 해고 선언(?)으로 들리기도 하고 처연한 위로로 들리기도 하는 저 말을 전쟁 소리에 귀에 못이 박히는 밤,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기도 하고 DVD를 통해 다시 듣고 싶기도 하다.

 

1956년 4월 4일 우리나라 영화의 한 역사가 세워졌다. 대한극장. 지금 대한극장은 대한극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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