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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프로이트 :: 모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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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의식이 <의식Bw.>이라고 기술되는 특수한 조직의 한 기능이라고주장한다. 의식이 산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의 지각과 정신 기관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쾌와 불쾌의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각-의식W-Bw>의 조직에 공간 속에서의 한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 가능할것이다. 그것은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고 다른 정신 조직들을 에워싸고 있을것이다.

(중략)

자극에 <대한 보호>는 자극<의 수용>보다 유기적 생명체에 더 중요한 기능이다. 보호적 방패는 그 나름의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으며, 외부 세계에서 작동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위협적 산물에 대항해서 그 보호막 속에서 작동하는 에너지의특수한 변형의 틀을 보존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쏟는다. 그 위협적 산물은 그 변형의 틀을 깨부수려 하고 따라서 그것은 파괴를향해서 움직인다. 자극 <수용>의 주된 목표는 외부 자극의 방향과 성격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외부세계의 작은 표본을 채취해서 그것을 작은 양으로 견본처리하는 것으로 족하다. 고도로 발달된 유기체의 경우 이전 소포의 수용적외피층은 신체 내부의 심층으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것의 일부가 자극에 대항하는 방패 바로 밑에 있는 표면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감각 기관들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292-297.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프로이트보다 한 세대 전에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지과학에 계승된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트보다 헬름홀츠 쪽에 더 가깝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잠깐 얘기를 돌려 사람의 눈에 대해 얘기해보자. 우리는 눈이 대단히 정교한 기관이라고 알고 있다. 가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사람의 눈을 근거로 신에 의한 창조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의 눈을 신이 창조했다면 신은 변태가 틀림없다. 눈으로 들어온 빛은 망막에 물체의 이미지를 맺는다. 그러면 이 이미지를 망막에서 뇌로 전달하는 신경은 망막 앞쪽에 있어야 할까, 아니면 뒤쪽에 있어야 할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당연히 망막 뒤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디지털 카메라도 그런 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인간의 신경이 망막 앞에 있다. 이러다보니 신경이 망막을 가려서 상이 맺히는 걸 방해할 뿐만 아니라 어쨌든 뇌로 연결되어야 하니 망막을 뚫고 지나가서 맹점이 생긴다. 신은 변태가 확실하다.

눈이 이렇게 엉터리로 생겨먹었는데도 정작 우리는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 망막을 가린 신경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맹점도 느낄 수가 없다. 단순히 느낄 수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렌즈 앞에 그물을 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물은 커녕 오히려 사진이 더 좋아졌다면 누군가 포샵질을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헬름홀츠가 내린 결론이었다. 헬름홀츠는 이 '포샵질'을 무의식적 추론(unconscious inference)라고 불렀다. 감각 기관으로부터 들어온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원래의 정보를 추론해서 복원하는 무의식적 과정이 의식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추론의 결과만 의식에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 추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착시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 추론은 불완전한 정보를 복원해서 완전한 정보로 만들어주지만, 가끔은 더 엉터리 정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추론은 추론일 뿐이기 때문에 항상 맞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유명한 뮐러-라이어 착시다. 붉은 색으로 칠한 표시를 보면 알 수 있자만 세 선분의 길이는 모두 똑같다. 그렇지만 가운데 선분이 위나 아래의 선분보다 더 길어보인다. 분명히 세 선분의 실제 길이도 같고 아마 망막에 맺히는 상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의식에 도달할 때는 가운데 선분보다 긴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분명히 세 선분의 길이가 같다고 알고 있더라도, 이런 의식적 생각은 무의식적 추론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무의식적 추론의 중요한 성질을 알 수 있다. 무의식적 추론은 그 추론 과정을 의식에게 드러내지도 않을 뿐만아니라 의식의 개입을 받지도 않는다. 의식은 무의식적 추론이 내놓은 결과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헬름홀츠의 무의식 개념은 현대의 모듈 이론으로 이어진다. 모듈(module)은 컴퓨터과학에서 넘어온 용어인데 커다란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독립적인 작은 부분들을 말한다. 윈도에서 파일을 열거나 저장할 때 뜨는 창의 모양은 어느 프로그램에서나 다 똑같다. 윈도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모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모듈 이론은 마음이 여러 개의 모듈로 되어 있다고 본다. 이 모듈을은 헬름홀츠의 무의식적 추론과 마찬가지로 의식이나 다른 모듈이 그 내부에 접근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 각각의 모듈은 시각 정보를 처리한다든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다든지, 남이 나한테 사기치는 게 아닌지 판단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고유한 자기 영역이 있다. 마음은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인지적 기능들이 모듈의 형태로 하나씩 덧붙는 식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런 모듈은 선천적인 것이기도 하다.

모듈 이론과 대립하는 입장은 뇌나 마음이 하나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스템이라는 전일론(holism)인데 역사적으로 축적된 증거는 대체로 모듈 이론의 손을 들어준다. 전일론은 이제 이 모듈들을 통제하는 중앙처리장치가 있다는 정도의 주장으로 많이 후퇴했다.

이제 프로이트와 헬름홀츠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프로이트는 감각 기관이 자극의 일부만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헬름홀츠에게이것은 감각 기관의 한계인 반면 프로이트에게는 이것이 감각 기관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자극의 수용보다 자극에 대한 보호가 더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또 헬름홀츠는 감각 기관과 의식 사이에 있는 무의식에 관심을 둔 반면, 프로이트는 의식의 뒤편에 있는무의식에 관심을 두었다.

지성사에 프로이트가 준 가장 큰 충격을 꼽는다면 무의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에 위치한 의식의 역할은 남겨 두었다. 그러나 이미 헬름홀츠에게서 의식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은 무의식에게 자리를 비워주었고 모듈 이론에 와서는 마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듈 이론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좀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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