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공간을 찾아서

http://nullmodel.egloos.com/1927414

과거의 철학자들이 남긴 책을 읽을 때는 그들이 시대의 한계 안에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칸트는 단 하나의 기하학(유클리드 기하학)만 있고, 그 기하학에 기반한 물리학만 존재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칸트는 계산이론이나 추상대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의 논증에도 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빠져있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는 빈틈없는 논증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구멍 투성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칸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C1. 경험 이전에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있다.
C2. 그런 조건 중에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있다.
C3.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책상 위에 고양이가 있다"는 진술만 보면 이 주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인다. 일상적 공간은 3차원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 이후에 이뤄진 수학과 과학의 발전을 고려하면 이 논증에는 문제가 많다.

우선 C1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여전히 옳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철학적 질문은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공학적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을 다른 종류의 물리적 장치에 실현하면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한 분야인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에는 '귀납 편향(inductive bias)"라는 용어가 있다.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알고리듬에 따라 똑같은 경험을 해도 다른 학습을 하게 된다는 걸 말한다. 칸트와 현대의 인공지능 연구자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이 질문이 "철학의 문제"이기는 하나 "철학'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이제 C2로 넘어가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구별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시공간(spacetime)이라고 할 때는 시간과 공간을 단순히 줄여서 부르는 게 아니다. 시공간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하나의 공간(?)을 말한다. 똑같은 현상도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은 갈릴레이에 의해 밝혀졌다. 한 관찰자의 관점을 다른 관찰자의 관점으로 바꾸는 수학적 방법인 갈릴레이 변환은 공간을 회전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현대 물리학에서 이에 대응하는 것이 로렌츠 변환인데 여기서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공간'을 회전시킨다. 즉, 경험을 가능케하는 조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구분되어야할 이유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기하학이 단 하나만 있던 시절에는 그 기하학이 미리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칸트 사후에 다양한 기하학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푸앵카레는 칸트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C2'. 모든 가능한 기하학을 산출할 수 있는 체계가 공간의 형식을 산출한다.

기하학은 여러 가지지만 이런 기하학들은 하나의 체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푸앵카레는 공간의 형식이 아니라 이런 공간의 형식을 산출할 수 있는 체계가 경험을 가능케하는 조건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어떤 기하학이 적절한지 선택해야 한다. 이와 함께 푸앵카레는 칸트의 질문을 심리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공간에 대한 직관을 얻는가? 피아제는 발달심리학 실험을 통해 푸앵카레의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perceive to act, act to perceive(제목은 영어지만 내용은 한국어니 걱정말고 클릭!)에서 피아제의 연구와 후속 연구들을 소개한 적이 있다.

푸앵카레와 피아제에서 이어지는 연구의 한 사례를 보자. 아래 그림은 예전에도 한 번 소개했던(지식체계의 발견) 탄넨바움과 켄트의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단순한 조작을 통해 partition, chain, order, ring, hierarchy, tree, grid, cylinder 등 다양한 공간의 형식을 산출할 수 있다. 탄넨바움과 켄트는 이러한 조작과 베이지언 통계학을 가진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줘서 각각의 지식에 적합한 공간의 형식을 찾아낸다.



아래 그림은 이러한 프로그램에 도시들 간의 거리를 데이터로 주었을 때 찾아낸 지구 표면의 공간적 형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원통(cylinder)의 형식은 산출하지만 구(sphere)의 형식은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가 원통 모양이 되었지만 어쨌든 칸트의 C2 없이 푸앵카레의 C2'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덧붙여 거리를 측정하려면 어쨌든 기하학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긴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자.


C2가 유효하지 않다면 당연히 C3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여기서 다시 한 발 물러나 칸트의 손을 들어준다. 푸앵카레 역시 상대성 이론 이전 시대의 사람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 푸앵카레는 어떤 공간 형식을 선택하든 근본적인 차이는 없고, 유클리드 기하학이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결국엔 유클리드 기하학을 선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은 나중에 다 뒤집힌다.

이제 C3로 가보자. 다양한 기하학이 있다면, 선험적 공간의 형식이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일 필요가 없다는 건 이미 지적했다. 게다가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리적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도 아니다. 게다가 전통적 공간관에서는 공간이 있고 물질이 그거에 놓여있지만, 상대성 이론의 공간관에서는 시공간과 물질이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공간의 형식을 먼저 가지고 데이터를 그 형식에 맞추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가지고 공간의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그건 물리학의 얘기고 일상적 경험은 다르지 않을까? 이것은 다시 심리학의 문제가 된다. 푸앵카레와 피아제는 공간의 형식을 경험적으로 찾아낸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마술이 흥미로운 건 우리가 직관적으로 가진 공간의 형식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기들이 오로지 경험으로만 공간의 형식을 발견한다면 마술을 보여주더라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겠지만 어떤 마술에는 아기들도 놀란다. 따라서 인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응하는 전체적인 공간의 형식은 아니더라도 공간의 형식 중 일부는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아기들은 어떻게 그런 형식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을까? 그런 형식은 아마도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유전자의 프로그래밍은 누가 해놓은 것일까? 신이 아니라면 진화 밖에 없다. 진화도 넓게 보면 학습의 일종이므로 결국에는 개체 수준에서 선천적이지만 여전히 경험의 산물이다. 우리의 크기나 속도가 상대론적 효과를 관찰할 수 있을만큼 크거나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슷한 기하학((실제 심리학 연구를 보면 정확히 같지는 않다)을 직관적인 공간의 형식으로 산출한다.

이제 정리해보자. 칸트의 주장 중에 C1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C2와 C3는 현대의 수학과 과학에 의해 타파된다. 선험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구분한다고 해도, 선험적 공간이 칸트가 주장한 바와 같아야할 논리적 이유도 없고 경험적으로도 그렇지 않다. 유일하게 남는 C1은 칸트의 시대에는 오로지 철학만의 문제였으나 이제는 과학과 공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기관은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라고 한다. 사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하나의 연구소가 아니라 여러 분과학문별 연구소의 집합체다. 60~70개쯤 된다고 한다. 심리학의 종주국인 독일답게 막스 플랑크 심리학 연구소도 있다. 아니 있었다. 이제는 막스 플랑크 인지 및 신경과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 für Kognitions- und Neurowissenschaften)이다. 심리학을 탄생시킨 나라가 자신의 대표적 연구소에서 심리학의 간판을 뗀 것이다. 이는 전통적 심리학이 이제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의 결합체로 재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딱딱한 것은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칸트의 철학적 문제는 한때 물리학과 심리학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이제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저주받은 운명 (아이추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님)
기하학과 마음 이론 (아이추판다)
칸트의 선험적 공간, 반과학주의와 반인문주의 (노정태님)

덧글|덧글 쓰기|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