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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의 위기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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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의 위기와 가능성 - 플루서를 중심으로


현대사회는 어떠하며,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은 다양하다. 그중 정보의 전달을 실마리로 접근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며, 정보 전달의 매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매체 연구다.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1920-1991)는 이 두 가지 이론과 관련하여 사유하였던 사상가이다. 여러 나라에서 여러 언어로 강의하고 저술했던 그는 단일한 이론 체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대신 정보 전달과 매체에 관련한 많은 글을 썼다. 21세기에 이르기 전에 그가 남긴 통찰은 현재의 정보사회에 적용할 때 의미를 잃지 않는다.

 이 글은 플루서의 통찰을 바탕으로 현대사회를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산재한 통찰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기 위해 그의 기본 인식과 개념, 명제의 해석에 집중하되, 필요에 따라 재배열하고 지금의 상황과 대조할 것이다. 이 글은 성공적일 때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 모두를 플루서의 저술에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문자, 디지털 코드1)
 여러 글에서 드러나는 플루서의 기본적인 세계 인식은 다음과 같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인간은 세계를 직접 만날 수 없다. 자신과 세계를 매개하는 ‘코드’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코드는 “상징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이며, 상징은 “다른 현상을 대체하는(‘의미하는’) 현상”이다.2) 인간은 코드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타인들과 의사소통한다.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코드의 수는 무한하다. 플루서가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코드는 그림, 문자, 디지털이다. 가능한 코드의 수에 제한이 없는데 세 가지 코드만을 다루는 것에 관해 플루서는 자신의 목적이 “일반적인 코드 이론”의 수립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위기”를 파악하려는 시도임을 명확하게 한다.3) 그가 말하는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굴 벽화부터 동영상까지 이르는 인간의 궤적을 그림 코드, 문자 코드, 디지털 코드와 관련지어 파악해야 한다.

 솔즈베리 평원의 스톤헨지에서 우리는 먼 옛날부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인간의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거대한 돌은 상징이며 돌들의 배열은 코드이다. 라스코 동굴 벽화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보다 쉽다. 그림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코드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시간과 공간이 담긴 사차원을 평면인 이차원으로 축소한 상징이다. 그림 코드는 상상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상상은 세계의 사태를 장면으로 축소하는 능력이자, 장면을 사태의 대체로 읽어내는 능력이다.4) 우리는 라스코 동굴 벽화가 있었던 사냥을 그린 것이라거나, 바라는 사냥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은 코드를 통해서만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명제는 코드가 인간의 이미 완성된 인식을 반영하거나 투명하게 전달하는 매체가 아님을 뜻한다. 인간은 코드에 의해 짜여진 대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림 코드를 통한 세계는 인간에게 마술적으로 존재한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한눈에 전체를 본 후, 의미를 찾기 위해 그림 속의 여러 요소로 시선을 옮기며 본다. 이는 동시적으로 구성된 그림을 통시通時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림 코드로 짜여진 인간에게 세계 속의 시간은 순환적이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다시 낮이 온다. 파종 끝에 수확의 시기가 오고, 수확 끝에 다시 파종기가 온다. 한 장면에 그려진 상호 보완적인 요소들을 전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바로 플루서가 ‘마술적 의식’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6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문자’로 그 기원을 짐작할 수 있는 문자 코드의 발명은 그림 코드에 대해 매우 비약적이다. 문자 자체는 그림을 선으로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그림에서 요소들을 찢어내 한 행에 배열하는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인식이 변혁된다. 문자 코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선형성線形性이다. 문자는 통시적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글을 쓸 때 무엇을 먼저 쓰고 무엇을 나중에 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요소들은 분명하게 분리되고, 요소들 간에 선후관계와 인과관계가 부여된다. 문자 코드에서는 상상의 능력 대신 개념의 능력이 요구된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명석판명한 인식clara et distincta perceptio’이란 실로 문자 코드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플루서의 시각에서 서양 철학사는 그림 코드에 대해 문자 코드가 우위를 점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다. 문자 코드로 얻을 수 있는 개념의 명징함은 상상의 풍부함을 포기한 대가이다.

 문자 코드로 짜여진 인간은 마술적 의식에서 벗어나 ‘역사의식’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행을 따라 통시적으로 읽은 후, 내용을 동시적인 것으로 종합한다. 이러한 전진하는 읽기는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세계는 더 이상 전체로서의 장면으로 인식되지 않고,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인식된다. 각 사건은 선형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범주에 따라 의미가 파악된다. 시간에 대한 순환적 인식을 대체하는 선형적 인식에서 역사는 ‘발전’, ‘진보의 길’, ‘정의의 길’ 등으로 일컬어진다. 인간이 학문, 정치, 예술 등의 분야에서 역사를 발전시켜온 근본적인 동력은 문자 코드를 바탕으로 하는 역사의식이다.

 오늘날 그림 코드와 문자 코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인간의 세계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디지털 코드이다.5) 디지털 코드에 관해 플루서는 그림 코드와 문자 코드의 경우처럼 일관된 도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는 새롭게 맞닥뜨린 상황을 동시대에 간파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점과, 디지털 코드 자체가 그림 코드와 문자 코드의 복잡한 병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확실한 것은 플루서는 현재의 위기가 디지털 코드의 전면적인 우위에서 비롯된다고 봤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심연을 매개하는 코드라는 기본 전제 위에서 그가 현대사회와 디지털 코드의 관련성을 탐구한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앞서 플루서가 현대사회를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맥락에서 분석한 방식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선형적 문화 모델과 본륜적 문화 모델
 플루서는 <담화, 잡담, 키치>에서 인간 역사의 바탕인 ‘선형 문화 모델’의 붕괴를 논한다.6) 이 글에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주요 개념들은 간단하게 정의된다. 선형 문화 모델은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 모델이다. 이와 같은 ‘역사주의적’ 문화 모델에서 인간은 유전된 정보뿐 아니라 습득한 정보까지도 전달한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란 정보의 전달이며, ‘문화’는 정보의 저장 장치이다. 역사란 정보를 계속해서 전달하고 저장하는 과정을 뜻한다.

 인간이 정보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전달하며 저장하는 것은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이겨내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자신과 세계 사이의 심연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을 요소로 분리하고 가공하여 ‘문화’를 만든다. 선형 문화 모델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문화는 축적되어 거대해진다. 이러한 문화 모델로 인간의 거의 모든 이념적 활동을 설명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는 정치 형태, 창조 행위와 노동 행위 등은 모두 역사주의적 문화 모델을 전제한다.

 그러나 플루서가 보기에 이 모델을 고수하는 것은 더는 바람직하지 않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문화 저장 장치란 열역학의 두 번째 주 명제인 엔트로피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플루서는 “모든 체계는 엔트로피로 용해되려는 성향을 지닌다”는 엔트로피 법칙을 비유적인 방식으로 차용한다.7) 모든 정보는 우연히 생겨났든 의도적으로 생겨났든 간에 결국은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망각과 죽음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과도 대응한다. 문화는 정보를 오래 보존하려는 노력이지만 정보가 각인된 문화 대상들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와해되며, 인간이 문화 대상을 소비함에 따라 와해는 더욱 촉진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연에서 소가죽을 얻어 구두를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 구두는 낡아서 쓰레기가 된다. 구두에 새겨진 정보가 와해되는 것이다. 수명이 다한 문화 대상들로 이루어진 폐기물들은 쌓여서 ‘환경오염’ 문제를 초래한다. 이에 따라 현대에는 선형 문화 모델에 대한 회의가 제기된다.

 플루서는 선형 문화 모델 대신 ‘본륜적本輪的, epizyklisch 문화 모델’을 제안한다. 이 모델은 ‘자연-반제품-문화-폐기물-자연’의 순환으로 도식화된다. 앞선 구두의 예에서, 가공된 소가죽은 자연도 문화도 아닌 반제품으로서 정보가 각인되어 구두가 된다. 구두는 엔트로피에 의해서든 소비에 의해서든 형태가 흐트러져 문화도 자연도 아닌 폐기물이 된다. 폐기물은 엔트로피에 의해 형태가 완전히 와해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엔트로피 법칙에 기반한 이러한 순환 과정은 부분적으로 조절될 수 있다. 인간은 가능한 한 문화를 오래 남기기 위해 본륜을 조절하려 하며, 이 과정에서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체험이 생긴다. 예컨대 우리는 ‘키치’의 사례에서처럼 과거의 것을 현재화하거나 미래화할 수도 있다. ‘대중문화’란 문화와 폐기물의 혼합물이다. 현재 우리는 선형의 역사적인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시간을 초월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플루서는 이 모델을 ‘탈역사적’ 모델로 명명한다.

 본륜적 문화 모델은 두 개의 반구로 나뉠 수 있다. ‘자연-반제품-문화’의 반구는 기존의 선형 문화 모델과 같으며, ‘문화-폐기물-자연’의 반구는 선형 문화 모델에서 간과되었던 엔트로피 법칙과 인간의 망각과 죽음을 반영한다. ‘문화-폐기물-자연’의 반구에서 시간의 흐름은 역전되어 폐기물은 문화로 되돌아온다. 폐기물은 문화에 비해 정보를 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장하기에 비교적 용이하며, 쾌적하게 전달될 수 있다. 플루서는 폐기물이 문화로 되돌아온 현상을 ‘키치’로 칭하며, 키치는 문화 현상뿐 아니라 ‘신Neo’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신자유주의, 신우파, 신좌파 등의 정치 현상도 포괄한다. 본륜적 문화 모델의 두 반구는 커뮤니케이션의 앙면적 속성을 드러낸다. 전자가 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함으로써 의미를 자아내는 커뮤니케이션의 ‘진실한’ 면이라면, 후자는 저장된 정보를 계속해서 전달함으로써 무의미로 향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그릇된’ 면으로 볼 수 있다. 플루서는 전자를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정보를 만들어내는 ‘담화’로 칭하고 후자를 망각을 목적으로 정보를 바스러뜨리는 ‘잡담’으로 칭한다. 망각의 커뮤니케이션은 담화의 부정이자 잡담의 긍정으로,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해 맞서는 대신 아늑한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논의 끝에 본륜적 문화 모델로 파악되는 현대사회에서 어떠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채택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정보사회의 커뮤니케이션
 현대사회는 정보의 생산·전달·저장 과정에 많은 인구가 참여하는 정보사회이다. 정보사회는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의 혁명적인 변화로 인해 성립되었다. 우편, 신문, 전화기, 라디오, TV, 그리고 컴퓨터는 새로운 매체의 대표적인 사례다. 디지털 코드는 특히 매체로 기능하는 전자 기기가 널리 보급되어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특정한 방식을 의미한다.

 플루서는 <도시 공간과 뉴테크놀러지>에서 정보사회에서의 공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를 약술한다.8) 이 글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심연을 매개하는 코드라는 명제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오가는 정치 활동으로 재해석된다. 정보 혁명 이전에 사람들은 정보를 수용하기 위해 사적 공간에서 나와 공적 공간인 상점, 은행, 학교, 극장으로 가야 했고, 정보는 송출되기 위해 밖으로 운반되어 전시·인쇄·강연 등을 거쳐야 했다. 공적 공간인 도시는 정보가 전달되어 사유화되는 장소였고, 사적 공간인 집은 수용한 정보를 새로운 정보로 가공하거나 저장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집과 도시를 오가는 이러한 ‘진자 운동’은 ‘나와 세계 간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했다.

 정보 혁명 이후 정보는 사적 공간으로 밀치고 들어온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정보가 송신되는 공적 공간은 철거되고, 각 개인은 망형 구조를 통해 사적 공간에서 정보를 수신하게 된다. 정보사회의 정보 전달 형식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한편으로 라디오, TV 등이 대표하는 발산적인 정보 분배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전화기, 인터넷 등이 대표하는 망형 정보 교환이 있다. 전자는 ‘방송’의 형식으로 사회를 획일화하며, 후자는 ‘네트워크’의 형식으로 사회를 수평화한다. 플루서는 전자를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후자를 탈정치적 의식의 등장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현재의 위기’다. 견지해야 할 것은 나와 세계 간의 변증법이다. 그러나 정치적 의식을 구하기 위해 이전의 공적 공간을 복구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문제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담화를 관철할 수 있느냐이다.

 따라서 정보사회에서 디지털 코드를 통해 잡담이 아닌 담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을 규명해야 한다. 앞서 공백으로 남겨졌던 디지털 코드의 분석은 그림 코드와 문자 코드가 지금의 우리에게 수용되는 양상을 탐구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위기는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기존의 코드를 토대로 담화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보사회에서 그림 코드는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유래 없이 널리 퍼져있다. 인쇄술이 이미지의 복제를 가능하게 한 이후로 사진술, 영화, TV, 컴퓨터로 이어지는 매체의 발명은 바야흐로 이미지로 넘쳐나는 시대를 초래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그림은 시각으로 인식되는 평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미지들은 중첩되고 음향이 덧씌워져 영상이 된다. 시청각 시대에 영상화한 그림은 시각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자극한다. 우리는 극장이 아닌 거리에서, 방에서 끝없이 명멸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코드와 결합한 그림 코드는 이전처럼 인간과 세계 사이를 매개하지 않고 세계의 겉을 감싼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미지에서 보는 것은 배후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다. 세계는 불투명하게 감춰지고 세계의 표면인 이미지는 투명하게 수용된다. 의미의 파악을 요구하는 난해한 이미지들(‘현대 미술’)은 격리되어 미술관에 전시되거나 화랑에서 고가의 매매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향유되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의 의미만이 되물어지며 쾌 또는 불쾌를 유발하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이는 잡담의 양상과 유사하다. 드라마, 연예 프로그램, 오락 영화 등이 주류를 점하는 대중문화의 향유자는 넘치는 시청각 자료에 둘러싸여 안온하게 죽어간다.

 한편 문자 코드는 분열된다. 문자 코드의 주요 구성 요소인 숫자 코드는 점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나간다.9) 수학을 기초로 하는 자연과학과 공학의 발달은 세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수량화를 통해 성취해나간다. 미분방정식에 이르러 세계의 모든 점은 포착된다. 갈수록 고도로 정교해지는 숫자 코드는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의 이해 대상에서 벗어나 훈련된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된다. 문자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문맹들에 대한 문민들의 지배 수단이었듯이, 정보사회에서 숫자 코드는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해야 하는 대상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과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이 전자 기기들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정보사회의 기술적 풍요는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숫자 코드에 대한 접근성의 정도에 따라 시스템을 통제하는 자와 시스템에 종속되는 자가 분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숫자 코드와 분리된 문자 코드의 위상이 문제적이다. 문자 코드는 선형 문화 모델 속에서 인간의 역사를 추진하는 동력이었던 것에 비해, 시청각 시대에는 부수적인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TV에서 문자는 이미지를 설명하는 역할에 그치고(‘자막’), 인터넷에서 문자는 길면 무시된다(‘세 줄 요약’). 파피루스에서 워드 프로세서에 이르는 텍스트 저장 장치의 발전은 텍스트 인플레 현상을 초래하여 학계의 안팎에서 텍스트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데에 기여한다. 문자는 세계를 해석하는 코드로서의 독보적인 지위를 잃었다. 오직 소수만이 텍스트를 꼼꼼하게 독해하여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지속할 뿐이다. 이는 그림 코드의 상황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플루서는 디지털 코드와 결합된 문자 코드에서 가능성을 인식한다. 가능성은 현재의 위기가 인식되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새로운 매체가 문자 읽기를 유용한 일에서 이탈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관조적 문자 읽기’의 가능성과 ‘대화적 회로 체계’를 형성하는 네트워크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두 방식의 가능성은 모두 디지털 코드를 통해 정보사회의 담화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인간과 세계 간의 변증법이 의미를 생산해왔듯이, 플루서에게 현대사회의 향방은 위기와 가능성이 어떻게 맞물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
1) 이 장에서는 《코무니콜로기》의 <3. 이 코드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와 《그림의 혁명》의 <코드화된 세계>를 주로 참고하였다.
2) 빌렘 플루서, 김현진 역, 《그림의 혁명》,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28.
3) 빌렘 플루서, 김성재 역, 《코무니콜로기》, 커뮤니케이션북스, 2003, 114.
4) 《그림의 혁명》, 29.
5) 이 글에서 ‘디지털 코드’로 지칭하는 것은 《코무니콜로기》에서는 ‘기술적 형상 코드’로, 《그림의 혁명》에서는 ‘테크노-코드’로 번역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두 용어가 지시하는 바의 공통점에 주목하고 논의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디지털 코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6) 《그림의 혁명》, 5-19.
7) 《그림의 혁명》, 6.
8) 《그림의 혁명》, 73-75.
9) <문자 숫자 병용 사회>, 《그림의 혁명》, 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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