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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간도를 되찾자]밀고 당긴 간도분쟁 3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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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를 되찾자]밀고 당긴 간도분쟁 300년



백두산에서는 3개의 큰 강이 발원하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이 천지 주변에서 시작해 각 방향으로 흘러나간다. 압록강은 서쪽으로, 두만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송화강은 북쪽으로 향한다.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에 대한 논란은 강줄기에서 출발한다.



"제1조 청-일 양국 정부는 두만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江源)에 있어서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양국의 경계로 한다."



1909년 일본과 청의 양국 대표가 맺은 간도협약의 내용이다. 이때 이후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완전히 굳어져버렸다.



간도협약 석을수 경계선 그어

간도협약에 나타난 석을수는 두만강의 지류이다. 백두산으로 뻗어 있는 두만강의 지류는 4개이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류가 홍토수(紅土水), 그 다음이 석을수-홍단수(紅丹水)-서두수(西豆水)이다. 석을수는 두번째에 위치하고 있는 지류이다.



두만강 석을수 경계선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한-중의 국경으로 남았다. 북한은 1962년께 중국과 '조-중 변계조 약'을 맺어 석을수보다 위쪽에 있는 홍토수를 경계로 했다고 전해진다. 이 조약은 아직 원문이 공개되지 않은 비밀조약이다.



간도협약 때보다 280㎢가 더 많은 영토를 얻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간도가 중국땅임을 사실상 인정해주는 결과를 초래한 조약이었다. 또한 천지의 절반을 중국측에 내준 셈이됐다. 당시 중국에서는 2인자인 저우언라이를 보내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군사지원을 상기시키며 국경협상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김명기 천안대 석좌교수(국제학)는 "이 조약이 비밀에 부쳐져 있기 때문에 국제법상 실제적으로 인정받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남북 통일 이후 북한을 비합법적 정부로 인정할 경우 조-중조약이 무효화될 가능성이 높다.



1905년 외교주권을 빼앗은 일본이 멋대로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과 비밀스럽게 체결한 조-중 변계조약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은 두만강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백두산에는 두만강뿐만 아니라 송화강도 있다.



1712년 조-청 양국 대표가 세운 백두산정계비에 따르면 양측 경계선은 압록강과 토문강이다. 토문강이란 명칭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청은 토문강을 중국식 발음인 투먼(도문)으로 해석, 도문강의 한국식 이름인 두만강이 경계라고 주장했다. 조선은 토문강이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라고 주장했다. 이때 이미 토문강의 동쪽인 간도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09년 간도협약 전까지 200년 동안 '토문강 논란'으로 이곳은 국경분쟁 지역이었다.

청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킨 위력을 앞세워 국경분쟁의 씨앗을 없애려 했다. 청의 요구로 열린 1895년 을유감계담판(국경회담)에서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게 맞섰다.



당시 청은 두만강이 양국의 국경임을 전제로 여러 갈래 지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측 대표였던 감계사 이중하는 비문에 나타난 토문강이 국경임을 주장하며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자고 맞섰다.



조선과 청의 대표는 3팀으로 나뉘어 홍토수와 홍단수, 서두수를 따라 정계비를 향해 출발했다. 현장을 답사한 후 이중하는 정계비 비문에 나타난 대로 강이 갈라지는 분수령을 기준으로 한다면 압록강과 토문강이 가장 근접한 분수령 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 사이에 정계비가 있으며 양쪽 경계선의 표시인 울타리 역시 두 강의 발원지 사이에 놓여있음을 보여주었다. 두만강 지류 중 정계비와 가장 가까운 홍토수도 울타리와의 거리는 40∼50리나 됐다.



청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이중하의 주장을 반박했다. 첫째는 당시 청의 강희제 때 만주문자가 있었는데 비문에 만주문자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비문이 새겨진 지 200년이 지났지만 자획이 완전하다는 것이며, 셋째는 비의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다.



협상결렬로 여전히 분쟁 지역

결국 을유담판에서 경계 문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문제는 2년 후인 1887년 정해담판으로 넘어갔다. 정해담판에서 청측은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청은 홍단수를 경계선으로 주장했다. 이곳에 15개의 비석을 세우려고 했다. 조선측 대표였던 감계사 이중하는 "내 목이 잘릴지언정 땅은 한치도 내놓을 수 없다"며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중하는 끝내 홍토수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노계현 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외교사)는 "당시 이중하는 석을수가 협상의 최소 조건이라는 청국의 공문을 간파한 후 협상을 고의적으로 결렬시키기 위해 토문강 주장을 버리고 청이 받아들일 수 없는 홍토수를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은 두번째 백두산 답사 후 석을수로 양보했다. 하지만 이중하는 홍토수를 고집했다. 협상은 결렬돼 간도땅은 그대로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됐다.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한국사)는 "을유담판과 정해담판를 통해 양측 대표의 국경회담이 결렬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 문제가 여전히 분쟁 상태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1888년 4월 28일 청국교섭공사인 원세개가 조선 외무독판 조병직에게 보낸 문서에서 "1887년의 감계는 협정에 이르지 못하고 경계는 후일의 감계를 기다릴 것"이라고 인정한 부분은 당시 국경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이 없어지자,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있는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다. 또한 1902년 종3품 이범윤을 간도로 파견해 관리토록함으로써 영토주권을 행사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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