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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전투에 대한 고찰 - 1 (수정)

http://sldn84.egloos.com/2524836

1. 들어가며

사실 병자호란 와중에 발생한 쌍령전투(1637년 1월 3일 발생)에 대해서는 그닥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많은 전사가들이 다루는대로 '미숙한 속오군의 문제점', '삼수병체제의 실전에서의 응용 혼선', '도입한지 얼마 안되는 조총운영의 문제 등', '지휘관의 무능' 등등의 테제에 저 역시 크게 공감하고 있었고, 설령 "쌍령의 패배가 당시 조선군의 전투능력의 저하"라는 테제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광교산과 탑동, 동선령을 상기한다면 굳이 쌍령전투를 변호(?)하려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니....)


그런데 이런 쌍령 전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동차를 굴리다보니, 막히는 고속도로-_-;;를 피해 국도로 다니다가 종종 쌍령을 지나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오고가면서 그 경사와 높이, 지형을 보고서 전투가 '수백의 청군 경기병에게 아군 수만이 깨진 이유'가 계속해서 궁금해졌고,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관련 연구서들을 찾다보니 의외로 관련사실이 미흡한 측면이 있더군요.


이에 졸자는 쌍령전투의 여러 세부상황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들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문제가 있거나 잘못된 점이 있다면 가열찬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2. 쌍령전투에서의 청군의 규모와 청측 참전자에 대해서


사실 쌍령전투를 다루면서, 조선군의 참전규모에 대해서는 번동아제님께서도 http://lyuen.egloos.com/4527650에서 다루어주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군에 비해 청군의 참전규모가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수백기로 4만여를 격파한 큰 전투임에도 그 수훈을 올린 이가 누구인지조차도 불분명하다는 것이죠.


일단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국방전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1986)는



"(상략) 1월 3일 청군은 6천명을 동원하여 대쌍령의 경상도 근왕병 진영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략) 청군은 2천명의 병력을 좌, 우 양쪽에 배피하여 우병사의 진영을 공격하는 듯한 양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우병사를 견제한 청군은 4천명의 병력을 집중 투입하여 좌병사에 대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 - p. 208



병자호란사의 이러한 서술은 청군의 병력 수뿐만 아니라, 청군 병력의 전개와 전투경과에 대해서 꽤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이러한 정보를 제공하는 관련 사료에 대해서는 제시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 당시의 사료들은 당시 청군 측의 병력 규모와 참전자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1) 조선측의 사료를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청군의 규모에 대해서, 조선측 사료의 대표로서 일단의 서술을 제공하는 것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입니다. 해당 전투의 청군의 참전규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 (상략) 민영과 허완이 끝내 듣지 않아서 마침내 적 3백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한다." - 『練藜室記述』, 仁祖朝古事本末편



연려실기술의 이러한 기록이, 세간에 잘 알려진 쌍령전투의 청군 참전규모에 관한 서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려실기술 자체는 매우 훌륭한 사료이지만, 이미 전란 종결 시점에서 어느 정도 지난 시점에서 쓰여진 자료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비교적 전투 종결 후에 가장 근시일에 쓰여진 기사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등장하는데,



"(상략)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하략)"  (平明敵騎數百, 馳騖於陳前, 而數千餘騎, 自山城掩擊, 方與山上砲射相擊) - 『承政院日記』 / 인조 15년 9월 9일 (甲戌)



위 기사는 허완의 아들 허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소문에 대해, 당시의 전투 상황에 대해 술회하면서 올린 상소가 『승정원일기』에 기재된 것의 일부입니다. 물론 해당 당사자의 아들이 공훈평가를 부탁하며 올린 상소이니 그 가신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는 있으나, 전투가 끝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전투에 대해서 함부로 부풀리거나 사실을 망작해내기는 힘들었으리라 봅니다. 아니 사실 좀 떠벌리려면 수만과 싸우다 죽었다 해야지 수천이 뭐니 수천이...!


이러한 승정원 일기의 서술 이외에도


"(상략) 이미 청은 수천기를 끌어와 허완의 진을 침범했다. 허완은 사졸로 하여금 북을 치며 응전하게 하였으니, 총성과 함성이 하늘을 진동했다. 청은 선봉에 선 기병 중 사상자가 많아 이기지 못했고, 허완은 승세를 타고 심양마 수십필을 빼앗았다. (하략) " 旣而。淸引數千騎。來犯完陳。完士卒鼓譟迎戰。礮聲震天。淸前騎中丸死者不可勝數。完乘勝。奪瀋陽馬數十匹。 -  『江漢集』 卷二十八 / 明陪臣傳二 / 許完


위 기록을 보면 청군이 수천 단위였을 뿐만 아니라, 만일 청군이 300여명이 전군(全軍)이었다고 가정했을 때, 1차 접전에서 말 수십필을 빼앗기고도 재공격("화약이 떨어졌다!"소리를 듣고 가해온 2차공격)을 가할 능력이 있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근성의 청군!?


이러한 문제에서 봤을 때 종래 연려실기술에서 다루는 청 기병 300이라는 명제는 당시 청군의 참전군의 전체규모로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현재 파악된 조선측 자료만 본다면 당시 청군은 최소 300~수천의 규모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청측의 사료를 중심으로 

이러한 조선측의 사료에 비해서 청측의 '쌍령 전투 자체에 대한 자료'는 매우 빈약한 편입니다. 일단 청군이 이러한 쌍령 전투 자체를 포커스로 다루고 있지 않을 뿐더러, 삼도 근왕병의 격퇴사실에 대해서 소략하게 적고 있기 때문이죠. 아래는 이러한 청측의 조선군 근왕병 격퇴에 관한 자료입니다.



①  "숭덕 원년 12월 기축일(12월 19일), 도도(多鐸) 등은 조선의 수도를 포위하였는데, 조선국왕 이종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도도 등이 뒤따라 이를 포위하고, 아울러 각도의 원병을 패퇴시켰다." (己丑,多鐸等進圍朝鮮國都.朝鮮國王李倧遁南漢山城.多鐸等復圍之,並敗其諸道援兵) --  新校本『清史稿』/本紀 / 卷三 本紀三 太宗二 / 崇德元年


② "숭덕 2년 춘정월 임인일(1월 2일)에, 조선의 전라, 충청도의 총병이 구원하러 오니 웨투어(岳託)가 이를 쳐서 패주시켰다." (二年春正月壬寅,朝鮮全羅道總兵來援,岳託擊走之.) -  新校本『清史稿』/本紀 / 卷三 本紀三 太宗二 / 崇德二年


③ "숭덕 2년 춘정월 정미일(1월 7일)에 조선의 전라, 충청도의 군대가 합하여 구원을 오니, 도도(多鐸), 양굴리(揚古利)가 이를 격퇴시켰는데, 양고리는 그 와중에 전사하였다." (丁未,朝鮮全羅、忠清二道合兵來援,多鐸、揚古利擊走之.揚古利被創卒) -  新校本『清史稿』/本紀 / 卷三 本紀三 太宗二 / 崇德二年



이러한 기록들을 검토하자면, 각도의 근왕병과의 전투에서, 전투의 경과뿐만 아니라 청군이 대항한 규모와 병력 수조차도 가늠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상기 기록들만 보자면, 조선측의 근왕병 중에서 '경상도 근왕병'과의 전투기록은 나타나지도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만 보자면 청측 기록에서는 경상도 근왕군과의 전투가 나타나지 않으며, 실제로 중국의 관찬 군사사인 『中國軍事史』청대편도 이러한 『청사고』의 기록을 수용하여 경상도 근왕군과의 전투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죠. 그렇다면 청측의 자료에서 쌍령전투에 대한 기록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위의 서술을 검토하자면, 쌍령전투 발발일인 1월 3일에 가까운, 1월 2일의 ②번 기사에 ‘전라도, 충청도군과의 교전이 있었다.’라는 기사가 있고, 전라도 근왕군이 청군과 두 번이나 교전했다는, ‘다소 이상한 사실’이 돌출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청사고』에 나오는 ②번 항의 기초 자료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의 기사는 이러한 문제가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 알려줍니다.



" 숭덕 2년 춘정월 임인일, 조선의 전라도, 충청도 총병인 심총병과 이총병이, 남한산성이 아군에 의해 곤란한 형세임을 듣자,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려 했다. 이에 병부다라패륵(兵部多羅貝勒)인 웨투어(岳托)가 이를 맞아 쳐서 패배시켰다. (壬寅, 朝鮮全羅忠淸道沈總兵李總兵, 聞南漢山城爲我軍所困, 率兵來援. 兵部多羅貝勒岳托迎擊敗之.)" -  『淸太宗實錄』 / 卷 33/ 崇德二年正月 丁丑 (中華書局版)



이 사료에서 일컫는 전라도 총병, 충청도 총병으로 나오는 '심', '이'는 실제로 경상감사인 심연(沈演)과, 충청도군의 잔병을 이끌고 합류한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경상감사 심연은 소수의 아병을 이끌고 조령에 머물러 있었음)
즉 『청태종실록』의 기술자가 경상감사인 심연을 전라도 행정관으로 착각한데서 생겨난 오류라고 볼 수 있겠죠. 『청사고』는 그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더욱 소략하게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일자도 1월 3일이 아닌 1월 2일로 적음으로서 하루의 오차가 존재하죠 -_-;) 


더군다나 『청사고』와, 『청태종실록』의 기록을 따르자면 전라도 근왕군이 두 번이나 교전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우리측 기록에서 전라도군이 교전한 것은 양고리가 전사한(즉 丁未일의) 광교산 전투 1차뿐이므로, 임인일(壬寅 : 1월 2일)의 전투는 사실 전라도군이 아니라 경상도군이 1월 3일에 청군과 치룬 전투이며, 그 전투에서의 청군의 사령관은 웨투어(岳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조선측 기록을 주목하자면,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성해응도 그의 문집 『풍천록(風泉錄)』에서, 쌍령전투 당시를 '至如同時雙嶺之戰。虜帥岳託乃以三十三人'라 서술하여 적의 사령관을 웨투어와 33인의 장수로 책정한 바가 있는데, 이러한 고증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청군의 장수가 웨투어(岳託)으로 밝혀진 이상, 쌍령전투의 청군 참전관련에 대해서 약간의 실마리가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웨투어의 내력을 살피자면 그는 단순한 장수가 아닌데, 그는 누르하치의 장자 다이샨(代先)의 장자이자, 당시에는 팔기(八旗)중 하나인 양홍기(鑲紅旗)의 장이었고, 청 태종 홍타이지를 황제로 옹립시켜준 실력자 중 하나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합니다.


이런 웨투어의 지위를 주목하자면 당시의 전투에 참여한 청군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데, 누르하치의 손자이자 홍타이지의 지친이고, 양홍기의 장인 그가 300의 병사만으로 전투를 치루거나 이를 주변이 내버려두기에는 특별히 급박한 정황이나 다른 사유가 없이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웨투어 휘하의  병력규모를 검토하자면, 당시의 팔기의 기군(旗軍) 하나 당 책정된 병사는 만주팔기(滿洲八旗)의 경우는 7500명이 상한이었습니다. 거기에 딸린 몽골팔기(蒙古八旗)나, 한팔기(漢八旗)는 계산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러나 그에게 소속된 양홍기 소속 기군이 모두 조선 전역에 참전했으리라고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드니, 쌍령에서의 웨투어의 병력은 7500의 정수를 모두 동원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의 도움이 필요한데,



"숭덕 원년 12월 을묘일, 패륵(貝勒 : 버일러) 웨투어 등으로 하여금 3천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 (己卯, 遣貝勒岳託等, 以兵三千濟師)" -  『皇朝文獻通考』 / 卷 293 / 四裔考一



위 기록은 인조가 서울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선발대를 뽑는 과정에서, 도도, 융알다이(龍骨大)등에게 각기 기동군을 나누어주면서 웨투어에게 분배된 병력의 내역입니다. 즉 병자호란 초기 단계에서 도강 시에서부터 도도 등과 합류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는 과정까지 웨투어의 군대는 3천을 육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성의 포위에 들어가고 12월 말에 청 태종이 서울에 도착하고 몽고병들이 도착하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대해서



"상이 대군을 이끌고 성(한양)을 나서 한강을 건너, 곧장 남한산성 아래 서쪽에 진영을 세우고 군세를 증원하여 포위하도록 하였다. (上統大軍, 由城外徑渡漢江直, 抵南漢城西, 駐營益軍圍之)" - 『皇朝文獻通考』 / 卷 293 / 四裔考一



이와 같은 기록이 있으니, 증원된 병력이 얼마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어도, 이들 포위군의 병력에 증원군이 더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원 후에 벌어진 쌍령전투에서의 청군의 참전규모는 악탁의 초기 통솔군 3천 +a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적어도 3천, 많게는 3천 이상의 수천 규모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청측의 자료와 조선의 자료를 교차해서 검토하자면, 쌍령전투 당시 청군의 참전규모는 최소 3천에서 많게는 3천 이상의 수천단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쌍령전투 당시 청군의 참전규모에 대한 저의 가설이었습니다. 다음 2편에서는 당시 전투과정에서의 지형의 문제와, 실제 전투 과정에 대한 생각을 적어볼까 합니다.



* 참고 1 : 병자호란 당시 각 도 근왕군의 전투 비교표.

 

조선군 병력규모

참전주체

발발일자

통솔자

검단산 전투

1,000

강원도 근왕군

12월 26일

원주영장 권정길

토산 전투

18,000

도원수의 군대,

황해도 근왕군

12월 25일

도원수 김자점

험천 전투*

6,000

충청도 근왕군

12월 27일

충청감사 정세규,

충청병사 이의배

쌍령 전투

30,000~40,000

경상도 근왕군,

충청도 근왕군

1월 3일

경상좌병사 허완

경상우병사 민영

충청병사 이의배

광교산 전투

2,000~10,000

전라도 근왕군

1월 7일

전라병사 김준룡

김화 전투

5,000

평안도 근왕군

1월 28일

평안감사 홍명구,

평안병사 유림

* 『병자호란사』에서는 험천전투 발발일을 1월 2일로 잡았으나, 『인조실록』12월 27일 기사에 정세규가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에 따릅니다.

 

* 수정사항 1)
원래 연려실기술의 청군 300의 서술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의문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체, 이 포스팅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그동안 검토한 『병자록』, 『병자일기(혹은 난리일기로 지칭)』상에서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병자록』을 후속 포스팅을 위해서 읽다가, 병자록 서술의 후반부의 부분에서 작은글씨로 쓰여진 부분에서 청군 300기와 그 선봉 33인이라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병자록은 그 출처를 적진에 잡혀왔다 도망친 승려에게서 들었다고 명시하고 있더군요. 

『연려실기술』의 서술은 바로 이러한 『병자록』 의 서술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병자록』역시 『승정원일기』의 해당조 만큼이나 우선시되는 1차사료인 만큼, 300명 설도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저는 당시의 군사적인 상황, 그리고 청군을 이끈 장수의 비중, 그리고 그 장수가 바로 직전에 이끈 병력의 규모 등을 검토했을 때 등등으로 보아 3000설에 보다 개인적인 신뢰를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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