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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산림황폐화 논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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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조선의 산하(山河)

일단 제3의 사나이님께서 쓰신 위의 글을 보고서, 조선후기의 임정(林政 : 산림정책, 식림정책 등)에 대한 나름의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부기해봅니다. 마침 보고있는 자료에 임정에 관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말이죠 -_-;;

사실 많은 분들께서 제 3의 사나이님께서 제시하는 글의 논점이 '무조건적 조선까'의 양식으로 쓰여졌다고 파악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여기서 단정을 내리기가 힘들다고 봅니다.

제3의 사나이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이....소위 일제시대 조선 식산과 아해들이 주장하던 것과 같던 '조선에는 산림정책이 없었다'와 같이 조선이란 나라가 삼림 파괴에 대해서 손을 놓고 방기하고 있었다는 주장(그래서 일제 아니면 안되었다는 식의)인지.....아니면 조선 후기의 산림정책의 포커스가 잘못되었다는 평가인지는 명확하게 언급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를 언급하시는 것이라면 이우연 선생님의 경우처럼 충분히 제기하실 만한, 그리고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주장이라고 감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3의 사나이님께서도 버드 비숍의 글과 연도 불분명한 사진을 제시하시고서, 조선 임정의 '부정적 결과'만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많은 분들께서 파악하신대로 '무조건적 조선까'의 모습을 보이실 소지가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본인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어떤 것이셨는지 입장을 명확히 해주시는 편이 앞으로의 논의 전개에 나으리라고 봅니다. 

현재까지의 논의에 대한 사적인 평은 여기까지 하고, 조선후기 임정에 대한 저의 사적인 의견을 나름 개진해보려고 합니다.

※ 다소의 보충설명을 부기하였습니다. 이에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비밀글님의 지적에 깨닫는 바가 있어 이 역시 보충설명에 부기합니다.



1. 조선후기 임정의 양상은 어떠했는가? 

문제의 글에 다른 트랙백으로 제기해주신 梓님의 글처럼, 사실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조선왕조가 산림의 남벌을 방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정책의 양상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 바, 하나는 금산(禁山)제도를 통한 '규제책'이고, 다른 하나는 식목의 권장을 통한 '수량증가책'이었습니다. 

우선 '규제책'을 보자면, 조선 후기의 금산책과 봉산책을 통틀어 일괄적으로 금지책-규제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국가의 법제상에서는 '산림천택은 곧 국가의 소유'라 하여 사적 소유가 금지되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실 스스로가 시지(柴地)의 절수를 통해서 사적 소유를 금한다는 조항을 스스로 위반하고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산림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활발해져 산송(山訟)의 양상이 본격화되었죠. 사실 산림에서 조상의 묘소를 입증하는 것은 그 조상의 묘소를 사용하였던 자신들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계기였기에,  조선후기의 산송은 단순한 무덤자리 논쟁이 아니라 지금의 주유소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소유권이 확대되어 그 임산물 수익을 두고 이러한 사회적 양상이 생기는 상황에서, 종전과 같은 '엄금'일변도의 금산책은 완전한 실효를 거두기 힘들었고, 결국 조선 조정은 '금산'정책이 가지고 있던 기본 이념을 법적 근거로 하여, 수량과 수종에 있어서의 제한적 통제를 가하는데, 그러한 변화된 제한적 변화책이 바로 '봉산'정책의 채택이었습니다. 즉 단순한 금지 일변도가 아니라 나름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대응의 양상이 존재했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단순한 금지책으로서의 금산-봉산책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수량증가책'으로서 식림사업이 얼마나 구체화되었는가의 여부가 중요한데, 이러한 양상은 조선초기에는 『경국대전』공전 재식(栽植)조에서도 구체화되고, 조선 전기의 양상은 梓님께서도 충분히 서술해주셨으니 덧붙일 것은 달리 없습니다만, 조선 후기에도 사실 이런 재식이 완전히 막장화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례를 다소 제가 참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상고하자면. 


① 1789년~1803년에 수원부 부근에 550만그루의 적송을 식재 1)

② 안동지역의 경우 송제(松堤)를 보수하고 밤나무 다수를 식재 2)

③ 충청소속 읍진에서 16개 읍진에 230처에 걸쳐 식송(植松) 3)

④ 강원도에서 1년에 21152주의 소나무를 관의 주도로 심다. 4)

⑤ 1875년에 강원도에서 다시 1년에 나무 34000주를 관의 주도로 심다. 5) 


⑥ 조령에 나무를 별도로 심어 그 결과 무성하게 되었다. 6)


이러한 국가 주도의 식재정책은 18세기 초엽에 본격화되는데, 군관을 가을에 파견하여 개별 감관(監官)을 모집하고 다시 그 감관이 지역내 요역징발 및 모군 모집 등으로 인력을 차출하여 이뤄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또한 국가는 기술적으로도 이러한 식재사업에 있어서 식재기술의 관리와 배포에 적극적인 면이 있었죠. 

당시 임금인 정조와 비변사의 당상들조차도 국가의 급박한 사업은 산림정책만한 것이 없다는 식으로7) 언급했음에도  이러한 조선정부의 산림정책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느냐 하면......그 대답은 '아니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대의 『비변사등록』에서 "산골과 연해의 자그마한 토지도 모두 개간하였으므로 실은 한 이랑도 비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8)라고 언급하듯이 인구의 증가와 전지의 부족으로 산림 자체에 대한 개간은 끓임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나무를 심는 속도보다 나무를 파괴하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던 것이었죠.9) 
 

한편 금산제에서 봉산제로의 정책변화도 시대적 욕구에 부응한만큼, 제한적 통제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더욱 세심한 관리와 통제가 요구되었지만 당시의 전근대적 관료제와 운영, 그리고 조선 후기의 혼란 상황에서는 그러한 관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보자면, 국가 역시 산림정책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며, 나름의 세심한 관리를 기울였습니다만, 문제는 그 정책의 지향성이 실패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겠죠.
 
 그런 점에서 사실 당시의 조선 후기 국가주도의 임정관리는 식민사학에서 주장하던 것과 같이 '조선에는 전통적으로 산림정책이 없었다'는 논리는 부정될 수 있겠지만, '정책의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인가?'라는 한 단계 다른 논의로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시장주의적 접근만이 대안인가? 

사실 조선 후기의 임정에 대해서 '정책의 방향성'이 잘못되었는가?의 논의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은 정책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제기될 만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조선 후기의 산림황폐화 문제를 언급하신 이우연 선생님의 취지는, 몇몇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조선에 식림정책이 없었다.'라는 논지가 아니라 '그 식림정책의 진행방식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취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제기하신 이우연 선생님의 주장을 다시 감히 요약해보자면, 조선 후기의 임정은 국가주도적 양상과 공유지적 운영양상을 통해 '인센티브 부여'에 실패했고, 그러한 인센티브 부여를 해줄 수 있는 사유화를 통한 시장주의적 접근이 부족했던 것이 조선후기 임정의 실패라고 파악되고 있습니다. 

즉 근대경제학에서 얘기되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명제를 들어, 사적 소유와 관리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관리방식은 결국 부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인데........

실제로 이런 주장은 정약용 역시 『목민심서』에서 송정에 대해서 다룰 때나, 그 형인 정약전 역시 「송정사의」에서 사유화를 통한 관리의 시행을 대안으로 제시했을만큼 당대인들의 시각에도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문제였습니다. 때문에 이런 문제로 당시 정책의 방향성을 비판하는 것은 실로 타당한 지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우연 선생님 주장의 큰 틀은 강희대제님의 덧글에서 훌륭히 설명해주셨다고 보고, 더 이상 첨언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다만 견지를 좀더 부연하자면, '산림관리의 사유화 중심정책'만이 유력한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보고 싶네요.

즉 목민심서 이래로 각 지식인들이 이러한 산림에 대한 사유지화를 일종의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그리고 이런 추세 하에서 지방관아의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사유화'를 전제로 하는 해결책이 나름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안동의 경우 하회마을에서 18세기경 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에서 살필 수 있듯이, 다수의 산림이 국유지화되어 있더라도 상당수의 산림이 사적인 목적과 용도에서 조성-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차원에서는 이러한 산림보호를 위한 별도의 향촌조직이 활성화되어 있었죠. 

18세기경의 지방행정에서는, 이러한 향촌조직의 존재에 주목하여 당시 지방관들은 이러한 사유지 소유주들의 향촌조직을 '금송계(禁松契)' 혹은 '송계(松契)'라는 이름으로 조직하여 활성화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10)  

이러한 송계는 관아에서 구성원들의 산림 소유권을 지방관아 차원에서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 산림의 관리를 위해서 관의 법 집행권한을 일부 분할받기도 하였던 것이었죠. 다소 심한 예를 든다면 산림물을 맘대로 취득하거나 삼림에 무단으로 화전을 놓는 자들에게는 사적인 린치를 가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습니다. 
(심지어는 지역 사족들이 송계의 권한을 남용하여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지적까지 들어올 정도였으니.... -_-;;) 

이렇게 '횡포'를 무릅쓸 정도로 '사적 소유권'을 상정한 당시의 식림관리양상이 각지에서 이뤄졌으니, 적어도 사유지로서의 산림은 그래도 남채와 남벌을 면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사유지 역시 남벌과 남채, 산림파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오히려 공유지보다도 심각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되었습니다.11)
   
사실 현대의 임업국가들을 보아도 국유지 비율이 캐나다 71%, 뉴질랜드 60%, 미국 39%, 독일 34%라는 점을 보았을 때12), 국유지의 사유화만이 완전한 대안은 아니라고 볼수 있을 것이며, 보다 심층적인 문제는 삼림 자체의 운영방식에 있다던지....아니면 당시 조선사회가 '산림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직면했던 것인지, 양자 간의 하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사실 이우연 선생님께서도 일본의 사례를 언급하실 때, 에도 말기 일본 봉건영주들과 사적 산림관리를 통해서, 채취적 임업에서 육성적 임업으로 전환되었다고 언급하시지만, 에도시대의 일본이 그것을 통해 산림황폐화를 극복하고 그 상태가 근대로 이행될 수 있었다고 '단언'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지적되던 가장 큰 문제는 인구 수의 증가와 전지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었던 만큼, 결국 조선사회는 전근대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쳐 스스로가 산림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떠한 양상에 있었을까요? 



3. 외국의 양상은? 

이부분에 대해서는 shanid님의 포스팅에서 먼저 말씀해주셨지만, 저 역시 여기에 감히 더 덧붙여보려 합니다.

중국의 경우 일찍부터 산림파괴에 대한 문제는 일찍부터 이슈화되었습니다. 목재가격 상승으로 인해 석탄과 벽돌의 사용이 일찍부터 권장되었고, 명~청시대 중국인들도 산림파괴로 인한 환경적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홍량길, 위원 등의 지식인들은 당시 양자강 중류의 빈번한 홍수가 상류의 산림파괴로 인한 토사유입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러한 산림파괴를 단순히 금단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은 중국사회 역시 동일했습니다. 일례로 당시 화전경작으로 이뤄지고 있던 옥수수의 경우, 화전에서의 옥수수 작황이 당장에라도 좋아지지 않는다면 도시의 수공업 임노동자들은 모두 굶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었던 것이었죠.

더욱이 명 홍무제 이래로 향촌의 식림사업은 리갑(里甲)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향촌 자체에서의 인구증가와 토지의 부족, 리갑제의 붕괴로 인해 사실상 적극적으로 시행되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인구의 증가와 식량공급을 위한 토지개간의 증가라는 점에서, 이런 성격의 '전근대적 성장의 한계성'은 명~청시대의 중국사회 역시 공유했던 것이었죠. 


한편 서구의 경우는 역시 금지책에서부터 산림관리의 발전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러한 금지책은 해군이 사용할 참나무림에 대한 벌채 및 파괴금지로 구체화되었습니다. 


1) 영국의 경우 
1544년 - 삼림의 개간 금지
1588년 - 제련용도의 나무 벌채 금지
1771년 - 참나무 목재 확보를 위한 보호령 제정 

2) 프랑스 
1661년 - 참나무 무단채취, 파괴자에 대해 해군조선소에서 사형집행 도구를 설치  
1669년 - '물과 산림에 관한 칙령' 제정, 산림관리에 법적인 근거 마련
1827년 - '산림관의 법전'제정으로 본격적인 국가관리가 도입  

 
루이 14세의 재정장관이던 콜베르의 경우는 "프랑스는 목재 고갈로 망할 것이다."라고까지 단언하면서 금지책을 확장했지만, 이러한 금지책에도 불구하고 왕실소유림까지 무단으로 벌채되거나 파괴되어갈 정도로, 당시 산림의 파괴는 막을 수 없는 추세로 빠르게 확산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양상에서 유럽사회에서 등장한 새로운 대안은 1590년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는데, 스페인 토양의 황폐화와 유목중심의 메스타 농법의 문제를 우려한 지식인들이 적극적인 식림정책과 중소지주 중심의 사적 소유자 중심정책을 주장한 것이었죠. 이러한 양상이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식림관련 서적의 편찬이나, 식물원에서의 연구 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사적인 공동체 측면에서 단순한 수익 뿐만 아니라 애국심, 애향심 등의 여러 동기를 들어 식림을 보전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었던 만큼, 유럽사회 역시 산림의 파괴에 대해서 나름의 내부적 노력을 기울였고 그 양상은 치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전시기까지 유럽사회에서도 이러한 '내적인 정책'은 대체로 실패했습니다. 

결국 자국 산림의 파괴에 대한 대안으로 '내부적 운동과 산림정책'이 성공하지 못하자, 유럽사회가 채택한 대안은 다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해외로부터의 수입이었죠. 영국의 경우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의 목재수입에 의존하다시피 했고, 프랑스 역시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재수입도 언제나 안정적인 것만은 아니었기에, 궁극적인 해결책은 목재생산지 자체를 장악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양상에서 캐나다 식민지가 개발되어 19세기 초 영국의 경우는 조선업 자체가 캐나다로의 이동을 모색하기도 했고, 동남아시아의 티크가 주요한 전략물자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유럽 역시 사유지 확대를 통한 식림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실제 양상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양을 키우든, 밀을 심든, 아니면 단순히 주택부지 및 용도부지로 빌려주든 하는 편이 보다 수익성이 높다고 판단한 소유주들에 의해서 산림이 다른 용도로 전이되며, 심지어는 소유주들이 산림보호를 위한 식림에 저항하는 양상까지 벌어졌습니다.13)  

이러한 양상들을 종합해보자면, 중국은 물론 유럽사회 역시 산림파괴에 있어서는 '전근대적 성장'의 한계와 더불어 산림파괴의 확대라는 추세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유지적 성격을 중심으로한 식림관리가 궁극적으로 성공한 것만도 아니었죠.

단, 유럽은 이것을 두 가지의 외부적 양상의 산림의 파괴를 지속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해외교역 및 식민지화의 확대를 통해 목재 자체수요와 경작지 확장의 문제를 외부의 수입 및 종속으로 대체하거나, 산업혁명을 통한 석탄의 대량소비를 통한 에너지원의 대체를 통해 전근대적 성장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이었죠. 양자 모두 그 사회 내부의 산림관리 정책 및 노력과는 무관한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 결론

결국 '산림의 파괴'라는 명제에 있어서, 분명 조선 후기는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책적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산림의 황폐화를 경험했고...그것이 상공업이 아닌 농업생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전근대적인 성장의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실은 상당부분 타당하다고 보며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슷한 시기에 '전근대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친 어느 사회도 '내부적 식림관리'를 통해서 자국의 산림을 지켜내거나 파괴를 억제한 양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비롯해 중국, 유럽의 사회도 이런 문제에 대해 국가의 관리를 통해서든 사적 소유권에 입각한 관리이든 간에 열심히 대응하고자 했지만....몇몇 국가의 경우 결국 그 해결책은 '내부적 노력'보다는 교역이든 식민행위든 간에 '외부확장'이라는 다른 양상에서 찾아야 했던 것이고, 그러한 점에서 '산림의 파괴'라는 점을 비단 조선만이 산림관리 정책이 없었다거나 정책이 잘못되어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으리라고 봅니다.     

(차라리 그런 점에서 해외교역과 '식민행위'를 늘려나간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었고, 조선은 이것을 못해서 비판받아야 한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요.)

결국 산림의 파괴라는 점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너무나도 필연적으로, 그리고 지금의 사회에서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별다른 대책과 극복이 묘연한 '전세계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원래 '환경사'의 취지란 이런 전세계적 지구파괴의 문제를 역사적 관점 각국의 사례를 통해 파악하여 전세계적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고민하자는 것이지, 일국의 범주에 설정하여 그 나라의 성패를 논하고 잘못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이글루스에 조선 후기의 삼림황폐화의 문제라는 '환경사적 논지'가 논의되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특정 목적을 위해 '변이'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도 감히 덧붙여봅니다.


* 덧말 :  제 블로그에서는 가급적 특정인물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하나의 주장을 전개하는 만큼 타당한 지적이나 문제점이 논의된다면 시의에 따라서 수용하거나, 추후에 검토하고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 덧말 2 : 많은 분들께서 전근대 일본의 사례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평가된다는 지적을 제시해주셨는데, 이러한 지적의 말씀들을 부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지적의 말씀들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 역시 추후 공부를 통해서 보충해나가겠습니다. 

* 덧말 3 : 글을 쓰다 보니 제 주장의 전개가 지나친 점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합니다. 즉 유럽의 산림정책이 유럽의 산림보존에 무관하다는 식이 아닌, 유럽사회의 주요한 극복양상(즉 석탄대체와 해외교역-식민지확장)이, 산업혁명 이전시기까지 전개되어온 산림보존의 정책과는 무관한 성격이었다는 식으로 전개되었어야 하는데, 유럽 산림정책의 유효성(특히 1827년 이후의 정책까지)을 완전히 부정하는 식으로 읽혀졌다면, 그것은 저의 잘못일 것입니다.
 다만 지속적으로 대체로 18세기...즉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유럽의 산림 정책도 산림의 감소와 위축이라는 점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입장은 계속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 사유는 대체로 보충설명 (1)에 근거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한 문제나 비판이 있으시다면 역시 기탄없는 질책들을 감히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 부연설명

(1)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나타난 산림관개정책은 사실 '근대적 산림정책'의 시조라 할만한 것으로 특히 18~19세기에 나타난 법령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임업학교 및 국가적 연구와 결합해 나타났으며, 국가의 강력한 정책 속에서 함께 시행되기도 했었죠.
 하지만 이러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유럽 임업정책의 선례가 되었다고 평가되는 프랑스의 경우 18세기 다시 삼림의 개간과 삼림감소가 추세화되었고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산림의 황폐화는 가속화되었으며, 국고수입과 해군력 보충을 위해 시행되었다고 언급되고 있더군요. (권순구(2007), p. 96.)  

→ 저 자신의 주장 전개에서 서구에서의 산림 정책이 산업혁명 이전시기까지, 삼림의 감소를 막지 못했다는 파악을 하게 된 판단요인을 부연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후의 시점, 즉 1827년의 프랑스를 시초로 근대적 산림관리 체계가 성립되고 이것이 각국으로 확장되어 서구에서의 숲의 복귀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팩트'로서는 당연한 것입니다만, 당시에 석탄사용이 확장되어 가고 있었고, 이미 국내에서의 목재수요 압력을 해외교역으로 주로 해결하여 삼림자원에 대한 사회의 절대적 수요라는 점을 크게 완화한 상태에서, 삼림의 복귀라는 측면에 대해 '순수하게 산림정책적 측면의 공헌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탈맥락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보고 싶군요.  


(2) 원래 '금송계-송계' 자체의 출발은 반드시 사적 소유권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조직만은 아니었습니다. 중앙으로 부세로서의 나무 상납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도 송계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마을 자체의 공유지나 문중의 소유지에 대한 공동관리계를 지칭하기도 했으니깐요.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 조선 후기의 많은 송계의 설립양상이 산림에 대한 사적 소유권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이 소유권을 입증받고 타인의 무단적 임산물 채취를 막는 주요한 수단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점 역시 존재합니다. (김선경(1993), pp.518~519) 그리고 이러한 송계는 '제한적 벌채'를 시행하고 이를 감독하는 양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송계 개념문제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어 부기합니다.  


(3) 비밀글님의 지적을 받고나서 저 자신이 잘못했다 싶은 부분이 있어서 부기합니다. 사실 저는 '정부 vs 비정부조직'이라는 점을 중시하면서 비정부조직적 양상 자체를 사적 소유권의 개입양상으로 간주하다보니, 결국 공동체와 문중산림 관리계로 나타난 송계와, 산림소유주간의 지역산림조합적 성격에 가까운 송계를 동일시해서 서술한 양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중 및 공유지 관리조직으로서의 송계는 엄밀히 말하자면, 사적 소유권의 주체가 불분명하여 사적 소유권이 전관(專管)된 조직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더욱이 공유지의 비극을 피할 수 없는 점은 동일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에 저 역시 공감하였습니다.

결국 조선 후기의 수많은 송계 가운데에서, '사적 소유주간의 지역산림조합적 성격'이 얼마만큼 송계 자체에서 비중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운영양상은 과연 사적 소유권을 제대로 보장해주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좀더 부연되어야 하는 바, 저의 글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부연되지 못하고 1차적으로 '해명'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다만 저의 재량과 여유로는 그런 '판단'을 구해보기는 부족한 바, 이에 대해서는 이런 성격의 것도 있었다. 정도로 수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추후에 다른 연구로 다뤄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보는 수밖에요 =_=;; 그리고 지적해주신 비밀글님께 감사를 드리며, 읽어주신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 주석들

1) Hermann Lautensach 저, 김종규 역, 『코레아』1권 (민음사, 1998), p. 223.

2) 『탁지지(度支志)』3권「전제(田制)」 제언(堤堰)조

3) 「충청수영소관도육연해송전표내식송산명주회성책(忠淸水營所管島陸沿海松田標內植松山名周回成冊)」- 동치 12년(1873)

4) 「강원도각읍식송주수급식송인역성명병록성책(江原道各邑植松株樹及植松人役姓名竝錄成冊」- 함풍 원년(1851)판

5) 「강원도각읍식송주수급식송인역성명병록성책(江原道各邑植松株樹及植松人役姓名竝錄成冊)」- 동치 14년(1875)판

6)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숙종 45년 6월 6일조.


7) 『정조실록』 정조 24년 4월 戊戌일.

8) 『비변사등록』 숙종 14년 4월 15일조.

9) 더욱이 조선 후기 지방관아의 주요한 재원 중의 하나는 화전세(烟田稅)였는데, 산림의 보호를 위해 화전의 확대를 막는다면 지방세 재원을 스스로 위축시키는 역설을 가져왔습니다. 결국 지방의 재정수요에 따라서 그 산림관리의 양상이 천차만별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 사실 이러한  송계가 비교적 많은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었음은 " 民各爲禁, 則守約而專以是之, 故雖以近來之童濯, 觀於各邑間或蔚密之處, 皆是松契所設之地也。"이라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정조 23년 4월 19일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  김흥순, 「조선후기 산림정책 및 산림황폐화」에서 연구사 정리를 재인용. (김흥순 선생님 본인의 주장은 아님) 

12)  산림청, 2006 산림통계연보

13)  권순구, 「조선 후기 봉산정책의 분석 」, p. 97.



* 주요 참고자료
이우연, 「18, 19세기 산림황폐화와 농업생산성」『경제사학』34 (2003)
권순구, 「조선 후기 봉산정책의 분석 」『한국정책학회보』11(1) (2007)
김흥순, 「조선후기 산림정책 및 산림황폐화」『한국지역개발학회지』20권(2) (2008)
김경숙, 『조선후기 산송과 사회갈등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2002)
김호종, 「조선후기 산림보호정책」『인문과학연구』2권 (1999)
박종채, 『조선후기 금송계 연구』(중앙대학교 대학원, 2000)
김선경, 「조선후기 산송과 산림소유권의 실태」『동방학지』77, 78, 79 합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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