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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희와 태권도 명칭제정의 날 1955. 4.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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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희와 ‘태권도’ 명칭제정의 날 1955.4.11 (3)

최홍희에 따르면 1955. 4. 11은 ‘태권도명칭제정위’에서 결정된 ‘태권도’가 탄생한 날이다.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지은이의 모든 저서를 면밀히 비교·분석한 바에 따르면, 사실적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보병 제29사단 창립 1주년기념식전에 이 대통령각하 임석의 영예를 갖게 되었다. 이 늠름하고 희망에 가득 찬 용사들의 믿음직하고 씩씩한 연무를 보신 대통령각하께서는 ‘태껸이 좋아! 남북통일 하는 데 이것이 필요해’ 하시면서 절찬하셨다. 이 말씀에서 새로운 용기와 특별한 힌트를 얻고 필자는 ‘태권’ 두 글자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얼마 후 이 대통령각하로부터 하사된 ‘태권도’라는 친필로서 종전에 불러오던 구구한 명칭에는 실질적인 종지부를 찍었으며(생략)”(『태권도교본』(1959) 개명의 의의 33쪽)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 그의 회고록 『태권도와 나』 1권(1997:335)에서는 달리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내 보고에 이어 우리 사단의 자랑거리인 당수시범대회가 있었다. 이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가진 대통령은 앉지도 않고 줄곧 서서 구경하더니 ‘저것이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택껸이야’ 한 다음 ‘이것으로 깨트렸지’ 하며 오른 주먹의 사용 부분을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택껸이 좋아, 이것을 전군에 가르쳐야 해, 그 서양 사람들은 윗동이만 쓰는데 발로 차면 빙그르 주저앉을게 아닌 가’ 라는 조크까지 했다.”

태권도 유래 및 개명의 의의 등 그의 저서에 따르면,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고문회’ 모임을 ‘명칭제정위원회’로 왜곡하고 있다. 모임 후 한 장의 기념사진과 당시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나란히 싣고 있는데, 사진에 새겨진 글씨는 단기 4288(서기 1955). 12. 19이다. 그런데 정작 주요 단서가 될 신문사명과 보도된 기사의 연월일을 삭제하였다.

1955년 4월 11일과 ‘태권도의 날’ 등의 왜곡은 그의 저서 『태권도교서』(1973)에서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무도의 성격에 알맞고 역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름을 짓고자 고심하다가 마침내 1955년 4월 11일 개최된 명칭제정위원회에서 본인이 제출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써 여태까지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이름을 태권도를 단일화하게 되었다.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는 대목이다.

앞서 ‘태권도 우남’ 휘호 관련해 소상히 밝혔듯이 이와 연계되는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자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 모임 자체를 그는 ‘명칭제정위원회’로 둔갑하고 있으며, 모임은 종로 2가 국일관 요정에서 가졌었는데 그 날자는 ‘1955. 12. 19’이다.

그는 1955. 4. 11을 명칭제정일이라고 했다가 어느 책에서는 틀(품새)을 완성한 날이라고 하기도 하는가 하면, 더구나 이승만 국부로부터 태권도 휘호가 내려진 날 등 일관성 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는 주간 Inside the world(1997. 3. 19 자) 지 창간 8주년 기획특집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권도 이름을 탄생시키는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은 남의 일이 잘되면 시기하고 모략하고, ‘사돈이 논 사면 배 아파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나는 저녁 만찬을 준비 해놓고 당시 국회부의장 조경구, 손덕성(청도관 관장), 이형근 장군(연합참모본부장), 정대천(국회의원), 한창완(정치신문사 사장), 장경록, 홍순호, 고광래, 현종명(청도관 사범)씨를 초대했습니다.

저녁이 끝난 후 “오늘 저녁, 내가 여러분을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무도가 있는데 이를 하나의 이름으로 명칭을 만들고 통일시키고자 모셨다”고 하니 모두들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거수로 하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기명 투표를 하여 당수, 공수, 태껸 등 여러 이름이 나왔는데 내가 써낸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통과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태권도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날 밤 회의에서 통과는 됐지만 이번에는 국가의 무도 이름을 정하는 데는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무대 비서실을 통해 ‘태권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무대에서 처음 정해진 ‘태껸’이었습니다. 나중에 나는 당시 경무대를 방문하여 비서관을 만나서 오랜 설득 끝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재가를 받았습니다.

자칭 ‘명칭제정위원회’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위 명단에서 유하청(미창사장)이 빠졌다. 최홍희를 포함 모두 11명이다. 1956. 1. 30 에 발생했던 김창용 특무대장 저격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은폐 뒤의 키워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랜 설득 끝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재가를 받았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태권도’ 휘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다.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 회고록 『태권도와 나』 세권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적혀있고 그 자체가 한편의 대하드라마이다. 필자는 창시자라는 말에 꼬투리를 캐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창시’란 어휘는 처음 시작함을 이르는 말이다. 태권도 무도명의 창시를 뜻한다면, 동반자 남태희 원로를 빼놓을 수 없다.

‘태권’ ‘태권도’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태껸’이라는 그 한마디에 착안된 것이고 그 중심에는 최홍희와 남태희가 있었다. 한마디로 공동 창안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실과 발전을 위해서도 남태희, 손덕성 원로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밝혀야 할 것이다. 특히 손덕성은 ‘청도관 제1회 고문회’ 모임 시 1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태권도 창시자’ 또는 ‘창시주’라고 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에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되레 우리는 최홍희와 남태희는 오늘의 태권도 무도가 세계의 중심에 서기까지 무도에 대한 열정과 근원에 대한 혜안이 있었기에 독창적 오늘이 있는 것이다. 오래된 ‘태권도의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는 그들을 기리는 진솔한 마음가짐이 더 소중하고 값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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