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블랙뮤직은 정말 진보했을까?
So what? 음악은, 아니 예술은 궁극적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를테면 개별적인 디테일, 세부적인 양식, 전문적인 테크닉과 같은 것은 두 번째로 친다. “그래서 무얼 말하고 싶은가?” 이게 처음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예술은 결국 일시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트렌드나 사조는 되지 못한다. 연속성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8군에서 흑인들의 목소리와 몸짓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된 한국의 블랙뮤직, 혹은 그 비스무리한 어떤 것이 있어왔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90년대 이후 세부적인 테크닉과 방법론들이 철저히 모방되고 분석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된다. 물론 그 힘은 늘 외부에서 조달되었다. 한국안의 미국인 미8군-교포-유학파 등으로 이어지는 이 외부적인 힘은 결국 한국에 어느 나라 못지 않은 컨템포러리한 블랙뮤직의 기운을 이식하는 데에 기여했다.
한때는 이것도 진보였다. 김조한이나 유영진의 유려한 기교가 적어도 ‘할 수는 있다'라는 가능성을, 나얼이나 박효신의 탈-아시아적인 창법이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라는 신선한 충격을 준 것만으로 굿-샷이었다. 이제 요사이의 젊은 뮤지션들은 ‘완전히 똑같이도 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거침없이 증명해대고 있으니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디즈의 데뷔작을 들어보면 음악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단연 압도적인 ‘블랙함'의 홍수를 체험할 수 있다. 약간의 한국적(?)인 뉘앙스도 배제한 채 철저히 미국 네오 소울의 방법을 쫓는다. 악기 배치 하나, 브라스 톤 하나, 버스-브릿지 구성의 스타일, 하다 못해 숨소리 하나까지 맥스웰이나 디안젤로의 그것처럼 완전히 찰지고 끈적하고 검은 모든 것이 폭발하고 있다. 이것도 전에 없던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원단 그루브의 향내 “Soul Tree”나 흑인저리가라 간들어짐의 에로틱 극단 “Makin Luv”들은 분명 이제껏 Made in Korea를 찍고 나온 모든 음반들 중에 가장 검다. 형태도 정신도 태도도 전부 검다. 소위 ‘가요'의 영향을 받지 않은, 90년대 중후반의 소울과 힙합을 듣고 자란 세대들만이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뼛속까지 스민 컨템포러리한 검은색으로 염색되어있다. “Devil’s Candy”에서 대담하게 메인 멜로디로 코러스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을 들어보자. 선배 뮤지션들이 하고는 싶었지만 결국엔 하지 못했던 컨템포러리한 소울의 향내를 디즈는 디테일까지 획득하고 있다. 이것도 혁신이라면 혁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찜찜하다. 완전히 유쾌하지가 않다. 이제 누구는 또다시 “이제 다 따라잡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쉰내나는 오래된 레파토리다. 시종일관 ‘똑같기만한' 무언가가, 자막을 켜지 않고 들으면 맥스웰인지 디즈인지 모를 이 소리들이 정말 그 길고 긴 여정,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간을 끌어온 한국형 블랙뮤직 만들기의 최종 완전체일 수 있을까? 정말로?
맥락의 문제도 있다. 네오-소울은 복고주의와 힙합이 만나면서 형체가 다듬어졌다. 60년대의 정신과 00년대의 테크놀로지, 훵크와 재즈를 베이스로 삼는다. 하지만 디즈의 네오-소울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걸까. 어떤 것을 복고하고, 어떤 것을 베이스로 삼아야 하는걸까.
누구는 그저 컨템포러리일뿐이라 말한다. 컨템포러리한 시대에, 글로벌한 세상에,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관에서 그저 같은 걸 공유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모순이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굳이 우리가 한국인의 국적을 가진, 흑인들이 만든 것과도 얼핏 전혀 다르지 않은, 아예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음악에 굳이 따로 떼어내 찬사를 보내야 하는 까닭이 있긴 있는 걸까. 한국의 대중 음악을 듣는다는 것, 그 음악을 지지한다는 것, 발전과 진보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 될까.
확실히 이러한 질문들은 난해하다. 어떻게 보면 선문답 같이 허무하다. 자의든 타의든 글로벌한 음악 문화에서 숨쉬고 있는 우리에게 블랙뮤직은 무엇인지, 서구형 대중음악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야무지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어쩌라고? 누구나 다른 답을 갖고 있기에 속시원히 해결될 문제는 아니며 더구나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답을 궁리해야 한다. 우리가 듣는게 삼성의 TV나 현대의 자동차와 같은 수출품이 아닌 ‘예술’이라면 적어도 이 답은 분명히 얻어야 한다. 언제까지 “똑같아"라는 말로만 흡족해야 할 것인가.
물론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거창하게 말해 한국의 블랙뮤직은 올해 출시된 Deez나 Jinbo의 앨범들에 이르면서 비로소 한 싸이클을 완성해 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연주-보컬-작곡-편곡-디테일-태도 어느 면에도 이제는 본토의 무엇에 뒤지지 않을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도 분명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So What? 그것이 진짜 우리 음악의 ‘진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진짜 진보하고자 한다면 “So What”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기왕에 컨템포러리한 무언가를 하고 싶고 해야 한다면 이제는 한발 늦은 스타일의 모방과 맹목적인 사운드의 추종만으로 만족치 말고 그 나름의 트렌드를 리드할 수 있는 안목과 방향성을 제시해 내야 할 때다. 서구의 음악을 소스(source)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들은 늘 무언가를 ‘제시할까' 그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국에서 컨템포러리의 다음 키워드가 나올수는 없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소위 한국에서 “뮤지션"으로 사는 자들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한다.
디즈의 [Get Real]은 의심의 여지 없이 훌륭한 앨범이다. 귀를 의심케 만드는, 국적을 확인케 만드는 블랙함의 홍수다. 형태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캐취하고 대범한 대중음악으로써 완성해 냈다. 그것은 그대로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하지만 이 앨범이 한국형 블랙뮤직의 새로운 한 사이클로 넘어가는 진보의 첫 걸음이 될지, 아니면 또다시 반복되는 강박적인 미국 사운드 추종의 루프로만 남을지 그건 아직 더 지켜보고 싶다. 그래서 조금은 찜찜하다. 그때까지는 아직이다. (7/8/2010)
김영대(toojazzy@naver.com)
Ethnomusicologist / Music Critic
음악취향Y
*원문은 웹진 음악취향Y에 기고되어 있습니다.
덧글|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