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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글활자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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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한문 혼용체 개발과 최초의 한글 활자



한성부신문국의 신문발간 책임자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을 국한문혼용체로 만들려고 기획했었다. 당시는 정부의 공식문서나 학술서적들이 모두 한문으로만 씌어지던 시대인데 정부가 발행하는 신문에 국한문혼용체를 쓰려고 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시중에 한글로 된 서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 우리나라에는 한글로 된 소설책들이 제한적이지만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고, 여성들을 중심으로 서간문 등에 한글의 사용이 빈번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천주교와 기독교의 전파 이후 성경번역에도 순 한글만을 사용하려는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다. 국한문 혼용체란 순 한글어법과도 얼마간 차이가 있다.

정부가 발행하는 신문의 활자를 국한문혼용으로 한다는 것은 우선 한글과 한문의 합성구조를 터득해야하고, 한자로 써야할 단어와 한글로 써야할 단어를 분리해 내어야 하며, 두 문자의 자모(字母)와 자형(字型)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글로 사용할 단어를 신문용 납 활자로 주조하여 쓰임새에 알맞게 수량을 산출하여 제작, 비치한다는 것 역시 한글의 쓰임새와 문장 구성들에 관하여 치밀하고도 과학적 연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연구가 당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한글 활자는 1881년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인들을 위한 순일본인 신문인 「조선신보」에 등장했다. 이 사실은 당시 출판 분야에서도 형편없이 낙후되었던 조선시장을 겨냥하여 일본상인들이 한글 활자를 먼저 개발하여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먼저 기록을 살펴보자.

1) 1883년 1월 박영효, 유길준 등이 귀국할 때 활자와 인쇄기를 구입하여 귀국했다. 이 활자로 유길준은 국한문 혼용신문을 제작하려 했기 때문에 이미 한글 활자를 구입하여 귀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활자들은 박영효 팀의 낙마로 인하여 한성순보가 순한 문으로 창간됨에 따라 사용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2) 후쿠자와 유키치의 회고록(1895년 4월 12일)을 보면 1883년 9월 동경에 유하던 김옥균이 책이나 신문을 제작하는데 사용하려고 平野공장에 한글 활자 수십만 개를 주문하였는데 이 활자들이 경성과 인천에 있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후쿠자와가 한양에서 신문 창간작업을 하는 이노우에에게 보낸 편지(1883년 11월 21일)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경성신문(조선신문)을 발간할 때는 반드시 조선의 가나문자(한글)를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조선 가나(한글)활자 4호 문자, 4,300여 종류, 각 150개씩, 총 649,800여개를 내가 보유하고 있는데 그 값은 2,079원 36전 (일본화폐)입니다. 혹 필요하면 보내드리겠는데 대금은 선불입니다. 혹시 그곳 박문국에서 구입한다면 포장 및 운임도 추가로 부 담해야합니다.’

결국 이노우에는 1885년 7월 일본에 가서 이 활자와 인쇄기를 구입하여 온다. 그러므로 한성주보에 사용된 활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1883년 11월경부터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쿠자와가 한글사용을 권유한 숨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후쿠자와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도 한문문화에서 벗어나야만 중국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본과 같이 한글을 혼용하면 문법의 동질성으로 일본과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후쿠자와는 유길준으로 하여금 일본의 신문과 서적의 일본 가나문자를 한글로 바꾸어보는 작업을 시킨다. 그랬더니 곧바로 뜻이 하나로 통했다. 후쿠자와는 ‘일본과 조선은 동문동어(同文同語)의 나라’라고 크게 자랑했다고 한다.

결국 후쿠자와의 국한문 혼용신문 발행 주장의 속셈은 조선에게 친일배중(親日排中)케 하려는 원대한 전략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글학회나 할 수 있는 이런 방대한 일을 누가 이루어냈을까? 바로 추금 강위(秋琴 姜瑋)다.

강위는 순조 20년(1826년)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약관에 기원 민노행(杞園 閔魯行)에게서 시를 배워 뒷날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 매천 황현(梅泉 黃玹)과 함께 조선 왕조 최후의 3대 시인으로 불린다. 그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熹) 서체의 영향을 받아 사신의 서생(書生)으로 청나라를 다녀오고,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서기(書記)로 일본을 다녀올 정도로 필체가 좋고, 문자에 해박했다. 그는 신문제작에 참여하면서 개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도 필답(筆答) 책임자로 참여했다.

그는 박문국의 고문인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 보다 40세나 연상이었으나 이노우에의 한글선생을 했고 그를 도와 국한문 혼용의 신문을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쏟다가 1884년(고종 21년) 향년 64세로 타계했다.

강위는 이미 1869년에 「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를 저술한 바 있다. 그는 전통 관료와 지식인, 또 궁녀 궁인들을 통하여 한글체를 연구하고 고안하여 그 사용을 권유한바 있으니 강위야 말로 당시 유일한 한글학자인 셈이다.

국한문 혼용을 처음으로 고안해낸 사람은 유길준으로 꼽힌다. 당시 유학중이던 그는 스승 후쿠자와의 권유로 국한문혼용체를 연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후쿠자와, 유길준, 이노우에, 강위로 이어지는 연구팀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국한문 혼용체가 탄생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은 혼용문법을 실용화시킨 일본의 연구를 많이 참고했을 수 있다. 즉 한자로 써야할 단어를 일본의 경우와 똑같이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강위와 이노우에는 김윤식과 다른 박문국원들에게 혼용체의 효율성과 편리함을 인식시키는데 성공한다. 강위와 이노우에는 이 문자를 보급하려면 임금의 명령이 필수적이라고 믿고 다른 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하여 국한문혼용체로 개서하여 우선 궁인들을 공략한다.

궁인들의 호응이 매우 높은데 힘입어 통리아문의 독판으로 임명된 김윤식은 다시 강위가 필사했던 여러 가지 국한문혼용문을 고종에게 제출했다. 고종은 그 편리함을 인정하고 드디어 다음 신문(한성주보)부터는 국한문 혼용체로 만들라는 내명을 내리기에 이른다. 1885년 5월의 일이다.

그러나 국한문혼용체를 개발 완성한 강위는 이미 고인이 돼버린 1년 후의 일이였다. 다시 1년 후인 1886년 1월. 그의 꿈인 국한문 혼용신문 한성주보(漢城週報)가 일본인 이노우에와 박문국원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창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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