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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대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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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대별 역사

출처: 위키백과 편집

일본의 역사 또는 일본사는, 일본 또는 일본열도의 역사이다. 이에 더하여 류큐 제도와 홋카이도와 관련해서는 오키나와의 역사와 아이누의 역사를 참조하십시오.

1. 구석기 시대

일본열도에서 확인된 인류의 역사는 약 10만년이 채 안되며, 약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3만 4천년 전에 화북지방에서 나이프형 석기로 불리는 격지석기가 전해져, 일본열도 전 지역에 널리 사용되었으나, 약 2만년 전에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세석인(細石刃)이라고 불리는 세석기가 주로 동일본에 확산되었다. 잠시동안 동일본의 세석인문화와 서일본의 나이프형 석기문화가 병존하였으나, 곧 세석인문화가 서일본에도 확대되어, 약 1만 5천년 무렵에는 나이프형 석기가 일본열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약 1만 2천년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온난화에 의해 대륙과 단절된 현재의 일본열도의 모습로 변하였다. 이후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나이프형 석기

2. 조몬 시대

조몬 시대(일본어: 縄文時代)는 일본의 선사시대 중 기원전 1만 3천 년 경부터 기원전 300년(약 1만 5천 년 전 ~ 1천 3백 년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1][2] 일반적인 석기 시대의 구분으로는 중석기에서 신석기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된다.

‘조몬’은 빗살무늬를 뜻하는데, 빗살무늬 토기가 그 시대의 유물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조몬 시대는 토기가 출현하고 수혈주거(땅을 파고 그 위에 움집을 짓는 양식)이 보급, 패총이 형성되었다. 지역에 따라 생활 전략은 다르나, 풍부한 자연환경의 혜택을 최적화하여 수렵과 채집을 기초로 한 사회로서 다양성과 상징성이 풍부한 토기문화를 발달시켰다. 유적의 수와 토기형식의 다양성으로 보면, 조몬 문화는 일본 동부에서 더욱 번영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삼림의 생산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교정탄소연대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토기는 16,000년 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얀가도리아스기를 지나고 토기의 형태가 다양화하여 전형적인 조몬 문화가 발달하였다.

조몬 시대의 종료는, 지역차가 크며, 전형적인 수전경작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 문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기원전 수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조몬 문화의 다음 시대는 오키나와에서는 패총시대후기, 동북 북부에서 홋카이도까지는 속 조몬 시대로 불린다.

 

빗살무늬 토기

조몬 토기

3. 야요이 시대

야요이 시대(일본어: 弥生時代)는, 홋카이도,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조몬시대에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10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대의 명칭이다.

야요이 시대는 수전경작에 의한 벼농사 기술을 가진 집단이 일본열도 밖에서 큐슈 북부로 이주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발견지인 도쿄 시 분쿄 구 야요이 쵸의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 연유해 야요이식 토기로 부른것에서 유래한다. (덧붙여, 그 후의 도시화의 진척에 의해 정확한 발견지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야요이식토기를 사용한 시대라는 의미에서 「야요이식 시대」라고 부르고, 그 후 점점 「식」을 생략하는 호칭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또한 여담으로, 야요이시대의 명칭의 기원이 된 야요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현재의 토기편년상에서 고훈시대 전기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시 되고있다.

기원전 5세기 중반에 대륙에서 큐슈북부로 수전경작기술을 중심으로 한 생활체계가 전해지고, 큐슈, 시코쿠, 혼슈로 전해졌다. 초기의 논은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에 있는 이타즈케 유적과 사가 현 카라츠 시의 나바타케 유적과 같이 큐슈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이다.

야요시시대에는 농업, 특히 벼농사가 도입되어 곡물의 비축이 가능해지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이것이 부(富)에 연결되어 가지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빈부의 차와 상하관계가 생겨났다. 또한 벼농사기술의 도입에 의해 개간과 농업용수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는 부와 경작지,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싸움을 통한 집단의 통합, 상하관계가 진전된 결과 각지의 조그만 나라가 생기고, 1세기 중반에 한왜쌍국왕의 금인(漢委奴國王印)을 후한으로부터 하사받고, 3세기 중엽에 야마타이코쿠의 여왕 히미코가 위에 조공을 바치고 야마토의 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금인을 받게되었다. 덧붙여 이 무렵 이후 일본은 대륙에서 왜라고 불렀다.

나라 현 야마토코리야마 시 히에다 정에 현존하는 환호집락〈일본국토교통성〉

4. 고훈 시대

고훈 시대(고분시대, 일본어: 古墳時代 (こふんじだい) 고훈지다이는 일본의 역사 구분으로, 3세기 중반부터 7세기 말까지의 약 400년을 가리킨다. 그 중에도 3세기 중반부터 6세기 말까지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북쪽으로는 도호쿠 지방에서 남쪽으로는 큐슈지방 남부까지 계속 만들어져온 시대이며, 전방후원분의 세기라고도 말한다.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된 7세기는 방분(方墳), 원분(円墳), 八角墳(팔각분)같은 고분이 만들어져 종말기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국가의 성립부터 고찰해보면, 전기・중기의 고대국가의 형성기를 지나, 후기에서 종말기에 걸쳐서 일본의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시대에 야마토 정권이 통일정권으로서 확립되었으며, 전방후원분은 야마토정권이 통일정권으로서 확립되어가는 중에, 각지의 호족에게 허가한 형식이라고 여겨진다. 3세기 후반부터 나라 분지에서 왕의 무덤이라고 보여지는 전대 보다 각별히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이 출현하고, 4세기 초기에는 오사카 평야에서 거대고분이 만들어졌으며, 4세기 말기 무렵에는 키나이(畿内)의 일부 지방에서 선진적인 고분군이 출현했다. 계속되는 5세기 중반에는 각지에 거대고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6세기 말기에는 일본 각지에서 거의 시간적으로 동일하게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야마토 정권이 확립에 따라 중앙・지방의 통치조직이 완성되어 더욱 강력한 정권으로 성장하였다는 증거로 해석되어진다. 그 후 당분간은 방분, 원분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오오키미(大王)의 무덤은 특별히 팔각분으로 만들어졌다.

대외관계로는, 5세기에는 야마토의 오왕(倭の五王)이 중국에 사자를 보냈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문자와 불교, 유교가 전해졌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토사기(土師器)와 스에기(須惠器)를 사용했다.

청동기도 대륙에서 들어왔지만, 고대 오리엔트 지역과 달라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격차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할 기회가 없었고, 성능이 뛰어난 철이 대신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청동기는 동탁(銅鐸)과 같은 제사, 종교용으로만 쓰이게 되었다.

 

닌토쿠 천황릉

5. 아스카 시대

6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를 아스카 시대라고 한다. 아스카 지방이 정치중심지이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6세기 후반 야마토 정권이 국내를 안정적으로 지배하였고, 오히려 정권내부의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다. 이 시기 백제에서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후 아스카 문화, 하쿠호 문화 등의 불교문화로 발전하였다. 6세기 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치권력를 한곳으로 모았다. 왜국에서도 7세기 전반에 걸쳐 쇼토쿠 태자와 소가 가문에 의해 견수사가 파견되었고, 관위 12계의 제정과 헌법 17조 도입 등의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호족들의 저항도 강해 중앙권력화는 벽에 부딪쳤고, 그 후에도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7세기 중엽 다이카 개신으로 중앙권력화 움직임에 일정의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중앙권력화 움직임이 일어난 최대 계기는 7세기 후반 백강 전투의 패배였고, 이로 인해 국내는 국가체제 정비로 일치되어, 중앙권력화가 급진전되었다. 더욱이 진신의 난에서 승리한 덴무 천황은 왕권강화를 철저히 하였고, 천황의 신격화를 꾀했다. 천황의 명칭도 이 시기에 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천황의 실질적 지배를 구현하기위해 율령제 도입을 서둘렀고, 8세기 초 다이호 율령이 제정되었다. 일본이란 국호도 다이호 율령의 제정 전후로 보고 있다.

호류지

6. 나라 시대

8세기 초에서 말까지를 나라 시대라고 한다. 나라에 도읍인 헤이조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율령국가체제가 형성 및 심화되었다. 왕토왕민사상을 토대한 율령제는 천황과 관료에 의한 일원적 지배를 지향하였고, 편호제, 반전제, 조용조 등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8세기 전반에 결처 율령제 체제를 강화하여 삼세일신법, 간전영년사재법 등의 농지정책도 율령체제 강화의 일환이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농민계층의 분화가 시작되었고, 백성들의 도주가 증가하는 등, 율령에 의한 지배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또, 신라를 제후국으로 보았으며, 도호쿠의 에미시와 규슈 남부의 하야토를 화외민으로 보는 중화의식이 있었다. 일본은 신라에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에미시와 하야토인들은 교화의 대상으로 보아 정벌하였다.

문화면에서는《일본서기》,《만엽집》,《풍토기》등이 편찬되는 것 외에도 견당사가 가져온 중국문화를 받아들였고, 귀족중심의 덴표 문화가 꽃을 피웠다. 불교에서는 진호국가사상이 강하여, 도다이지와 고쿠분지가 호국사찰로 건립되었다.

도다이지의 금당

7. 헤이안 시대

8세기 말경부터 12세기 말경까지는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간무 천황이 조성한 헤이안쿄를 도읍으로 했다. 헤이안 전기에서는 농민의 계층분화가 한층 진행되어 전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율령국가체제의 한계가 나타났다. 이에 조정은 11세기 초엽 무렵 지방분권적 국가체제로의 개혁에 착수하여 지방의 통치권한을 지방관인 즈료(受領)에게 주고 지방관청인 고쿠가(国衙)를 통해 지방을 통치하였다. 이 즈료·고쿠가 지배체제 아래 수취제인 후묘 체계(負名体制)가 형성되었고, 군사에 있어서도 고쿠가 군제(国衙軍制)로 전환되어 무사계층이 등장하였다. 또, 중앙정치에 있어서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의 외척임를 이용해 정계를 장악했으며, 11세기에는 섭관정치를 하기에 이른다.

12세기에 들어서자 국가체계가 변화하기 시작하여 12세기말부터 13세기에 걸쳐 장원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고, 장원·공령제라고 하는 중세적 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에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상황이 정무를 보는 인세이가 시작되었고, 이원정치의 시작이었다. 이로 인해 헤이안 시대 말기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이 일어났으며 무사가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고, 무가정권의 시작으로 볼수 있는 헤이씨 정권이 탄생하였다.

헤이안 중기에 들어서 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나라 시대에서 보이기 시작한 독자적 일본문화가 전면에 나타난다. 이를 국풍문화라고 한다. 이 시기 히라가나·가타카나가 사용되기 시작했어며,《겐지 이야기》,《침초자》로 대표되는 모노가타리 문학(物語文学) 등이 융성하였고, 밀교와 말법사상이 널리 퍼졌다. 또,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되기 시작하여 사원이 많이 건립되었다.

겐지 이야기의 아사가오

8. 가마쿠라 시대

12세기 무렵부터 14세기 무렵까지를 가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가마쿠라라는 명칭은 간토 가마쿠라에 막부를 두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공가정권과 간토의 무가정권이 병립된 시기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주축으로한 가마쿠라 막부는 겐페이 전쟁으로 잘 알려진 지쇼·조에이의 난에서 승리하여 헤이씨 정권을 무너뜨렸고, 이 과정에서 슈고, 지토 임명권을 가지게되어 중앙의 조정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된다. 이후 조큐의 난에서 천황가가 가마쿠라 막부에 패배한 후 공가 정권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미나모토 가문의 쇼군은 3대에서 단절되었고, 이후 쇼군은 천황가에서 취임하지만, 명목상일뿐 실권은 싯켄인 호조 가문이 장악하였다. 이를 싯켄 정치라고 한다.

13세기 중기부터 화폐경제의 침투와 상품유통이 발달, 촌락의 형성, 지토들에 의한 장원·공령의 관리 등 사회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사회체제에 반발하는 무사와 농민집단인 악당과 자치권을 가진 총촌(惣村)이 생겨났다. 이 움직임은 13세기 후반 일어난 두 번의 원나라의 침략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지지기반이었던 무사들이 막부를 이탈하게 되어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막부는 대응책으로 덕정령을 반포하였고, 막부의 실권은 싯켄 호조 가문내의 도쿠소의 무사들의 장악하였다. 또, 조큐의 난이후 황위계승문제에 본의 아니게 막부가 개입하였고, 불만을 품은 고다이고 천황이 도막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는 공가와 막부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동조하여 막부를 멸하였다.

문화에서는 운케이와 가이케이의 금강력사상 등 사실적 미술이 전개되었다. 또, 종교면에서도 가마쿠라 신불교가 성립되어 민간에 불교가 보급되었다.

겐페이 전쟁을 그린 병풍

9. 남북조 시대

남조가 있었던 요시노 산

14세기경을 남북조 시대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새로이 천황을 옹립하여 기존의 천황과 대립한 1336년부터 남조와 북조가 통합한 1392년까지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내란이다.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하고, 친정을 펼치지만, 이에 무신인 무사의 불만이 증폭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이반하였다. 그리고, 고다이고 천황을 요시노로 추방했다. 이로인해 일본 전국은 북조와 남조를 지지하는 파로 갈려 대립이 심화되었고, 그 뒤 남조는 북조에 통합되었다.

문화면에서는 신분질서를 경시하고 화려한 복장을 입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바사라가 유행하였다. 또, 렌카가 유행하였고 격문인 니조가와라 낙서 등에서 볼수 있듯 문화의 서민화 움직임을 볼수 있다.

10. 무로마치 시대

로쿠온지의 금각

14세기 무렵에서 16세기 무렵까지를 무로마치 시대라고 한다. 무로마치라고 불린 연유는 교토의 무로마치에 막부를 두었기 때문이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대항에 새로이 천황을 옹립해 북조를 열었으며 교토 무로마치에 막부를 열었다. 각 구니에 두었던 슈고에게 경제적 특권을 주어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또, 구니의 행정과 사법권 담당했던 고쿠가의 기능도 점차 슈고의 권한으로 흡수되었고, 슈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이를 슈고 영국제라고 부른다. 이렇게 구축된 지배체제를 무로마치 막부-슈고체제라고 한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북조를 통일하였고, 명나라와의 무역을 하여 명황제로부터 일본국왕에 책봉되었다. 또, 슈고 다이묘의 세력을 억제하는데 노력하였다. 하지만, 슈고 다이묘의 반발도 있어 막부와 슈고의 다툼이 많이 발생하였다. 15세기 중엽에 와서 쇼군의 후계문제로 촉발된 오닌의 난이 발생하여 막부의 힘은 약해져 갔고, 메이오 정변을 계기로 막부-슈고체제는 붕괴되었다. 이후 전국의 하극상의 기조가 팽배해졌으며 슈고를 밀어내고 슈고다이 또는 지역호족인 고쿠진 등이 지역을 지배하는 센고쿠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 시대의 사회원칙은 자력구제였으며, 각계층 안에서 연대를 해 행동하였다. 즉 잇키가 발생하였고, 촌락에 있어서도 자치권을 가진 총촌(惣村)이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서일본에서는 교역이 활발하였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한반도와 중국대륙에서는 왜구가 출몰하였다. 문화면에서도 렌카와 사루가쿠, 다도 등 무로마치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문화는 선종의 영향을 받아 간소한 것이 특징이다.

11. 센고쿠.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로마치 시대 중 15세기후기부터 16세기후기까지의 시기를 센고쿠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는 슈고와 슈고다이, 지역호족인 고쿠진 등의 출신들이 센고쿠 다이묘 거듭나 이 시대를 호령하게 된다. 센고쿠 다이묘는 중세적 지배체계를 점차 붕괴시키고, 분국법 등을 제정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들 다이묘는 영국 일원을 통일하여 자신의 영국을 지역국가로 발전시켰다. 이를 다이묘 영국제라고 한다. 이들 지역국가는 일본 각지에 병립하였고, 지역국가간에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무력으로 해결하였다. 이러한 흐름속에 16세기 중반 등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병농분리 등에 의한 부국강병책으로 급속히 지배지역을 넓혀갔다.

이 시대에 농업생산력은 향상되었으며, 지역국가내의 유통이 발달하였고, 각지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또, 유럽과의 교역이 시작되었고, 화승총과 그리스도 교 등이 전래되어 기존의 전술과 종교관념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점차 세력을 신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위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마침내 반목해온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였다. 사실상 무로마치 시대는 끝이 나고,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거처를 기후 성에서 아즈치 성으로 옮겼으며 본격적인 천하통일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전일본 통일 사업은 오다 가문의 실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추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도호쿠와 규슈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였고, 천하통일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중세적 지배체계·지배세력을 배제·억제하는 데 노력하였고, 태합검지를 통하여 기존의 토지제도인 장원·공령제를 없앴다. 또, 전국이 통일되면서 정치와 경제는 안정되었고, 다이묘와 무사가 중심이 된 모모야마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러한 중 도요토미 히에요시는 영토확장에 꿈을 두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만, 전쟁기간 중 생을 마감하였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퇴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내의 실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악하였고,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한 반이에야스 세력과 이에야스 세력간의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승리하였고, 도요토미 가문의 점차 쇠퇴하였다.

12.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

 

요코하마의 미함대와 미군

1603년부터 1867년까지의 시기를 에도 시대라고 한다. 정이대장군직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열어 정권을 잡았다. 두 번의 오사카 전투에서 정적 도요토이 가문을 멸문한 이에야스는 금중병공가제법도와 무가제법도로 조정과 다이묘를 통제하였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때에 막부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참근교대란 제도를 통해 지방 다이묘세력을 약화시켰다. 시마바라의 난이후 막부는 그리스도 교의 탄압과 쇄국정책을 펴면서도 네델란드와 청나라와는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무역을 하였다. 또, 조선과는 조선통신사의 왕래 및 쓰시마 번을 통하여 무역을 하였으며, 류큐왕국과 에조치에서는 사쓰마 번과 마쓰마에 번을 통하여 무역을 하였다.

에도 중기에 일어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에도를 수복하기 위해 막부는 과다한 지출을 하였고, 재정이 악화되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네요시 때에는 막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 상업의 발달과 사회의 안정을 배경으로 겐로쿠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또, 번교와 서당과 같은 데라코야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교호의 개혁으로 막부의 재정을 근실히 하였지만, 다시금 재정은 악화되자 막부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의 개혁, 미즈노 다다쿠니의 덴보의 개혁을 하여보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고, 점차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겐로쿠 문화와 같이 상공인이 중심이 된 가세이 문화가 꽃을 피웠고, 가부키, 하이카이, 우키요에 등이 유행하였다.

화폐상품 경제가 발달하자, 예부터 쌀을 기반으로 연공수입을 가졌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막부와 같이 번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이 개혁이 성공하였고, 막부 말기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에도 말기 구미제국은 일본에 문호개방을 요구하였고, 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유럽 여러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채결하게 된다. 이에 존왕양이 사상이 고추되어 갔고, 막부의 고위관료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단행하였고, 정권은 조정에 이양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부터 700년 가까이 이어온 무가 정권 시대는 막을 내렸다.

13. 메이지 시대

일본 역사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연호로 그 시대를 구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천황의 재위기간이 시대구분 기준이다.

보신 전쟁때의 사쓰마 번사

메이지 연간(1868년 ~ 1912년)을 메이지 시대라고 한다. 대정봉환후 조정과 도막파의 여러 번들이 왕정복고와 보신 전쟁 등을 통해 구 막부세력을 축출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신정부에서는 천황이 대권을 가지며, 구미제국의 제도를 적극 도입하였다. 폐번치현 등 메이지 유신이라고 불리는 여러 개혁도 이 때 행해졌으며, 오키나와, 홋카이도, 쿠릴열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편입하여 일본국 영토를 확정했다. 그리고 1871년 일본 정부는 특명 전권대신인 이와쿠라 토모미를 단장으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성하여 정부의 젊은 고관들을 구미에 파견해 발전된 서구 사회를 배워오게 하였다.

문화면에서는 구미제국의 새로운 학문·기술·음식 등이 전래되었고, 서양의 문학 사조를 받아들여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개인주의적 소설과 문학이 등장하였다. 식생활에서도 일식뿐만 아니라 양식이 널리 퍼졌으며, 기존의 문화와 다른 이색문화가 전개되었다. 이를 문명개화라고 한다. 종교면에서는 종래의 신사와 불교가 혼재되어 있던 것을 분리시켰으며, 이로 인해 불교탄압 등의 과격한 움직임도 일어났다.

신정부는 불평등조약의 개정과 국회 설치, 헌법제정 등, 국가체제정비에 힘쓰는 한편, 산업화와 군사력강화를 국책으로 추진하여 근대국가로의 초석을 쌓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세계열강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국제적 지위 확보와 조약개정에 성공하였다. 또,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여 구미제국과 같은 식민지정책을 폈다.

14. 다이쇼 시대

다이쇼 연간(1912년 ~ 1926년)을 다이쇼 시대라고 한다. 다이쇼 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대다. 이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데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다이쇼 시대 초기 비교적 개방적인 제2차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사퇴하고 번벌[3]세력에 기반을 둔 제3차 가쓰라 다로 내각이 들어서자, 이에 반발하여 오자키 유키오와 이누카이 쓰요시를 중심으로 한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나 이를 저지하였다. 이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국제 사회에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전후 불황으로 도야마 현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고,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도 활발히 일어나 농촌에서는 소작쟁의가 일어났으며, 전국수평사가 조직되어 차별철폐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 소동의 영향으로 산미증식계획이 세워졌으며, 수평사운동의 영향으로 형평운동이 일어났다. 또, 정치에서는 정당내각이 본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제2차 호헌운동으로 국민에게는 보통선거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무렵 러시아에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을 경계하여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에 더해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 더더욱 일본 사회를 궁지로 몰았다.

문화에서는 인도주의 문학이 대두하였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종합잡지, 문학전집등이 대량 출판되었으며, 더욱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어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간토 대지진

15. 쇼와 시대

쇼와 연간(1926년 ~ 1989년)은 쇼와 시대라 한다. 쇼와 시대 초기 불경기에서 회복되지 않은 채로 금융공황을 맞이하였고, 더욱이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 사회는 더욱 불안해졌다. 구미제국들은 식민지를 포함한 블록경제를 구축하여 난황을 타계하였지만, 식민지가 열악한 일본은 할 수 없었다. 이에 파시즘이 대두되었고, 일본은 만주로 눈을 돌렸다. 일본군부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국제사회에서는 비난이 일어났다. 정치계일각에선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묵인되었다. 이후 군부와 마찰을 빚어온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해군장교에 암살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총리암살사건 이후에도 젊은 장교가 주축이 된 2·26 사건이 일어났고, 더 이상 정당내각을 유지 할 수 없었다. 이로써 정계는 군부가 장악하였고, 사회 전반에 걸쳐 군국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만주국 수립이후 전역은 확대되었고,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중국을 지원하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미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게 된다. 이후 미국은 일본에 석유금수조치를 내렸고, 이에 대항하여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점차 전세는 일본에 불리하였고, 본토마져 위협받게된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되었고, 쇼와 천황은 옥음방송을 통해 대내외에 항복을 알렸다. 패전 후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점령하에, 일본 헌법이 제정되었고, 천황은 나라의 상징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적 존재이며, 국정관여가 금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주권을 회복하였고,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동서냉전하에 서방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정치에서는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 체제가 지속되었고, 경제에서는 고도성장을 통해 경제대국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석유파동 이후 일본의 경제는 안정성장기로 들어섰고, 일본의 산업은 중화학공업에서 자동차, 전기기기, 반도체로 산업구조가 전환되었으며, 서비스업을 비롯한 제3차산업이 크게 성장하였다. 쇼와 말기에는 엔고와 무역흑자를 배경으로 투기열이 과열되었고, 이로인한 거품경제로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 투하 후 히로시마 시

 

고도성장의 상징인 신간선

16.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연간(1989년 ~ )는 헤이세이 시대라고 한다. 쇼와 말기의 거품경제 붕괴로 인해 장기간 불경기에 고통 받았으며, 많은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시작하였다. 정치에서는 구조개혁 노선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걸프 전쟁 후 제정된 국제평화협력법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금기시 되었던 자위대의 해외파견이 실행되었다. 또, 2001년 일어난 미국의 9·11 테러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일본은 이를 지지하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견하였다.

정치적면에서는 일본국 헌법과 교육기본법의 개정을 논의하는 것 이외에도 우정민영화 등 구조개혁을 본격화 하였다. 하지만, 2007년 정권여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구조개혁 현안들에서의 여당의 입김은 힘을 잃게되었다.

경제면에서는 거품경제의 붕괴이후 기업들의 자구책이 결실을 보아 2006년 호경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2007년부터 표면화된 세계금융위기 등으로 경기는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2008년 주가의 하락과 상장기업의 도산이 증가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취직을 하지 못한 청년층이 증가하였고, 불법체류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증가하였다. 일명 묻지마 범죄와 같은 흉악범죄가 다수 발생하는 등 사회불안이 가증되고 있다.

문화면에서는 축구와 야구 등에서 일본인 프로선수의 해외 이적이 두드려졌다. 또,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되었으며《오타쿠 문화》로 불리는 문화가 일본의 서브컬처로서 주목받고 있다.

 

자위대 해외파병에 사용된 수송기 C-130H

 

도쿄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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